제29회 동대문학상 우수상

오재령(문과대학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4학년),

시 「고구마 캐기」 외 2편

고구마 캐기

인공배양소에서 남자는 얼마든지 고구마를 캐가도 좋다고 했다 젊은 농부였다

우리는 열심히 고구마를 캐기 시작했다 저녁에 따뜻한 방에 다함께 둘러앉아 고구마를 구워먹는 상상을 하며

 

뜨거운 빛이 성긴 밀집모자의 틈새로 들어온다

빛 한 줄기가 고구마를 관통한다 고구마를 손에 들고 있어도

빛은 고구마를 통과해 내 손을 뚫고 지나간다

 

손등의 상처가 부풀어 오른다

물속으로 가라앉은 불순물이 다시는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는 동안

 

햇살보다 햇살 같은 뜨거움이

인공배양소에 가득하다

 

신기하지 않니 친구들에게 물었는데

친구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고구마만 캤다

남자가 나를 보며 웃는다

 

오랜만의 휴가를 떠난 사람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어떤 기분이 들까

티켓이 편도행이었다는 사실과

아무 의심도 없이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것들

 

남자가 물을 가져왔다 나는 땀을 훔치며 물을 마셨지만 친구들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친구들의 등 뒤로 고구마가 쌓여갔다

 

다 가져갈 수 있겠어?

친구들은 대답하지 않는다

 

친구들의 등은 바다를 건너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닮았다

마르지 않는 등과 쏟아지는 땀

출렁이는 표면장력

 

남자는 인공배양소의 온도를 높인다

오늘밤은 눈이 올 것이다 따뜻한 방에 둘러앉아 고구마를 먹으며 우리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그 위에 쌓이는 흰눈 우리가 사랑한 모든 것에 대해

 

그 방에 남자는 없을 것이다

 

오래된 약속

낡은 동네에서 천진한 벽화를 발견할 때 왜 부끄러워지는 걸까 반쯤 벗겨진 벽화의 껍질과 무너져내리는 벽돌의 틈새로 풀은 질서없이 자라난다 부서진 담벼락은 흔들리는 사람의 얼굴을 닮았고 남겨진 이들이 누군가의 등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날도 그런 날도 있었다

 

국경은 시시때때로 바뀌었다

 

호명되는 이름은 매번 달라져도 서로를 부르는 이름은 달라지지 않는다

 

부드러운 발음이다 우리의 혀는 갓 태어난 동물의 체온만큼이나 따뜻하고 축축했다

 

한겨울이 가면 한여름이 오는 사이 사라진 계절들을 애도하며 무국적인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 우리의 만남은 소속과 무관하였다

 

누군가의 바깥에 서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떠나가는 사람들은 선물처럼 말을 두고 사라진다

 

우리는 떠나간 이들을 미워하거나 사랑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보채는 아이처럼

알고도 모르는 것이 넘쳐흘렀다

 

어느 날에는 갈대밭에 사슴 한 마리 피흘리며 누워있기도 했다

 

빈 선물상자에는 이국의 공기가 들어있겠지 그곳의 들숨날숨으로 폐를 씻어내리고 성스러운 물을 마시며 새로운 몸과 정신을 가지게 된다는 이곳만 아니라면 어딜 가든 천국일 것이라 말한 사람이 있었다

 

이곳을 떠나세요 여기엔 미래가 없어요 떠나간 사람들의 메아리가 망령처럼 마을을 떠돌고

남겨진 이들은 오늘도 죽은 사람들에게 먹일 따뜻한 밥을 짓는다

 

낯선 이름을 선물받자

나는 새로 태어난다 새 사람이 되어서

 

우리에겐 집이 없어도 돌아올 곳이 있다 이것은 약속에 가깝다

 

장미공원

주말마다 장미공원에 간다 관리인은 장미가 피지 않는 6월에는 화분을 가져다 놓았고 7월에는 진짜 장미를 심었다

 

장미가 만든 그늘과 그 밑에 누워 쉬는 사람의 뒷모습이 있다 정말 장미 한 송이 밑에서 그 사람은 홀로 어둑해졌다 그늘이 그의 몸을 모두 가려주었고 그 속에 얼굴을 묻고있었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라면 만약 그늘 아래 누워 우는 내가 눈을 뜬다면 나를 바라보는 관리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런 풍경은 항상 뒷모습에서 뒷모습으로 전해지네

 

저기 봐, 돌고래쇼다 어른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이 사람의 얼굴은 환하다 주말마다 나를 장미공원에 데려오는 어른들은 매번 바뀌었지만 그들은 항상 웃고 있다 사육사가 휘파람을 불 때마다 돌고래가 튀어오른다 관리인은 매일밤 돌고래가 수족관의 벽에 머리를 찧는다고 했다 나는 그와 한 번도 대화한 적 없지만 알고 있다 돌고래의 마음을 들었다고 했다

 

가요, 지금 가요 어른의 손을 잡고 싶어서 나는 눈을 뜨고 일어선다 장미가 만개한 정원의 한가운데였다 멀리서는 돌고래쇼가 한창이다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도 자꾸 땀이 배어나왔다 등을 보인 채 원을 만든 이들 사이로 돌고래가 튀어오른다

사람은 누군가의 어깨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 사람의 슬픔을 알아챌 수 있다

 

다시 눈을 뜨면 정원은 내가 버린 꽃들로 가득하다 제철이랬다 7월의 어느날 어른은 어느 곳에도 없이 혼자였다 관리인이 호루라기를 불며 내게 다가온다 그는 손짓한다 언젠가 본 것 같은 동작으로 이곳에서 나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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