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교정에 아름다운 봄꽃의 향연이 열리고 있다. 꽃을 보면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해진다. 그런데 따스한 봄에도 여전히 마음은 겨울처럼 차가운 사람이 있다. 우리나라 20·30대의 우울증은 높아가고, 혼자 지내는 은둔 청년은 13만 명이나 된다. 꽃다운 청년들이 안타깝게도 힘들고 외롭게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겨울의 앙상한 가지만 보면 도저히 거기서 꽃이 피리라고 상상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그 안에는 어김없이 꽃을 피울 수 있는 생명력이 들어있다. 우리도 이처럼 내면에 마음 꽃을 피울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조건으로만
올봄에 영화 한 편을 보았습니다. 촉촉이 적시는 봄비 같은 영화였는데, 이름은 입니다. 제목을 ‘지나온 삶들’로 보아도 좋을 법한데, ‘전생(前生)’으로 읽히는 것은 제가 불교를 공부하기 때문일까요. 이름에 끌려 무작정 영화관으로 향했습니다.부모를 따라 캐나다 이민을 떠나야 했던 12살 소녀. 그녀가 부딪히는 낯선 땅에서, 두고 온 나라의 기억들은 ‘전생’의 일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이민을 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한국에서는 노벨상을 못 타잖아”라고 당차게 말하던 나영이는 지금 노라라는 이름
모든 중생들은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하기[離苦得樂]를 바란다. 그렇기에 자신을 잘 돌보고 다른 모든 생명도 잘 돌보라 한다[離苦得樂].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것을 무조건 믿으라고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직접 와서 보라고 한다.행복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명상을 통한 마음수련으로 자신의 힘든 마음을 힐링하고 충전하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이완을 통한 집중 상태에서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보는 것. 내가 이완되고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고 습관을 고칠 수 있게 됐다면 어떤 방법이라도 모두
2015년 파리에서 열린 제21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파리 기후변화협약이라고 부르는 파리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산업화 이전 수준 대비 지구의 평균온도가 2℃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온실가스 배출량을 단계적으로 감축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2015년 우리 정부도 2030년까지 배출 전망 대비 37%를 감축하겠다고 발표하였다. 또한 2030년까지 2017년 대비 24.4%를 감축하겠다고 발표하고, 2021년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을 제정하였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근대적으로 기온이 측정되기
학생들과 이야기하다가 왜 백제나 신라의 기와에 표현된 연꽃무늬는 실생활에서 접하는 연꽃과 다르냐는 질문을 받았다. 기와지붕을 장식하는 건축 재료 중에 연꽃무늬로 장식한 수막새라는 것이 있음을 이미 알고 있다는 생각에 여간 반갑지 않았다. 불교의 상징인 연꽃을 기와지붕의 장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현실과 다른 이상적인 형태의 연꽃무늬가 탄생하게 되었음을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또 고구려 기와의 연꽃무늬는 활짝 핀 모양이 아니라 꽃봉오리 모양으로 뾰족하게 장식돼 있고, 백제나 신라는 보통 활짝 핀 연꽃잎과 씨방에 연꽃씨
아쉬웠다. 안타까웠다. 목숨을 걸고 그 먼 바닷길을 건너 왔는데, 아직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많이 남았는데, 귀국이라니... 단기유학승 신분이라는 벽 앞에서 좌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스님은 운명을 거스르기로 한다. 아니, 그것이 운명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귀국선 배가 육지를 떠나는 순간, 스님은 바다로 뛰어든다. 그리고 육지로 기어올라서, 기꺼이 ‘불법체류자’가 된다. 일본 천태종의 엔닌(円仁, 794-864)스님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는 838년 6월 13일부터 847년 12월 1
살아가면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우리는 흔히 ‘내게는 인연복(因緣福)이 없다’는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겪게 된 커다란 상처가 우리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아서 그렇지 평범한 일상 속에서 경험하고 느끼는 작은 것들이 주는 행복은 의외로 많다. 우리는 불교와의 인연을 말할 때 ‘맹구우목(盲龜遇木)’이라는 비유를 든다. 맹구우목은 깊은 바다 속에서 사는 눈 먼 거북이가 백 년에 한 번씩 수면 위로 올라오는데 그때 마침 망망대해에 떠다니는 구멍 뚫린 널빤지를 만난 확률을 말한다. 그만큼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난다는
우리들은 ‘오브 더 피플’ 하면, 노예해방과 관련된 남북전쟁 때 링컨 대통령의 게티즈버그 연설문을 생각하면서, ‘바이 더 피플(by the People)’과 ‘포 더 피플(for the People)’을 함께 떠올린다. 여기서의 ‘피플’은 ‘유권자 개인’이라는 것이 본래적 의미인데, 보통은 모든 주권자들을 포괄하는 의미로도 사용한다. 아무튼 우리는 자유와 관련하여 ‘바이 더 피플’과 ‘포 더 피플’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목소리를 내면서도, ‘오브 더 피플’에 대해서는 설명을 머뭇거린다. 그런데 개인의 주체성에서 보자면 ‘오브 더 피플
인생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마음’은 어디에 있는 건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영혼과 마음은 심장에 있다고, 즉 ‘마음이 심장’이라고 잘못 말한 이후에 오래도록 사람들은 그렇게 알았다. 그러나 17 세기 이후 과학이 발달하면서 마음은 심장에 있는 게 아니라 뇌의 작용이라는 것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렇다면 뇌는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 ‘뇌’ 하면, 왠지 합리적이고 창의적일 것 같은 착각도 들지만, 불행하게도 ‘뇌’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이나 믿을 수 없는 기관이다. 뇌의 중요 기능은 지혜 개발이나 높고
세상에서 ‘보시’라는 말만큼 아름다운 단어가 또 있을까 싶다. 보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남에게 아낌없이 주는 일체의 행위를 말한다. 물건이나 돈을 내주면 ‘재시(財施)’고, 진리나 지식을 가르치면 ‘법시(法施)’가 된다. 여기에 하나 더. 다른 존재들의 근심이나 두려움을 없애주는 ‘무외시(無畏施)’가 있다. 모든 보시행에는 ‘무주상(無住相)’의 실천원리가 작동한다. 무엇을 준다는 마음도 그것을 다시 받을 생각도 완전히 여읜,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가리킨다. 두말할 필요도 없다. 불교는 멋진 인간이 되는 길이다.세 가지
고려 후기의 불교계 고승 일연이 찬술한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실려있다. 혜통이 승려가 되기 전, 그의 집은 남산 서쪽 기슭 은천동의 어귀에 있었다. 어느 날 집의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아서 죽이고 그 뼈를 동산에 버렸다. 그 이튿날 아침에 뼈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핏자국을 따라서 갔더니 뼈는 자신이 살던 굴속으로 돌아가서 어린 새끼 다섯을 품고 웅크리고 있었다. 이것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을 놀라고 기이하게 여겼다. 그는 감탄하고 망설이다가 문득 속세를 버리고 승려가 되었고 이름을 혜통으로 바꾸었다
어느 날 붓다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구들이여. 불사(不死)의 존재에 이르고 싶은가?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아라.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을 수행하면 큰 공덕을 받게 되고 불사의 존재에 이를 수 있다.”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은 쉽게 말하면 자신의 죽음을 가까이하는 방법이다. 붓다의 말씀대로 죽음을 가까이 하는 것은 우리 삶에 도움이 될까? 몇 년 전에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던 중 연구원 임기가 끝났고, 공교롭게도 바로 코로나 19 팬데믹까지 덮치면서 삶이 지독한 고난 속에 휘말려 들어간 적이 있었
경전에 따라서 십이연기, 중도, 사성제, 팔정도 등으로 다르게 되어 있다. 그 가운데 공통항을 찾아보기란 다소 어려운 일이다. 그러한 차이는 제자들이 받아들이는 데서 생겨난 차이라고 생각된다. 이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최대공약수를 찾아보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란 집착 등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선입견과 권위 있는 가르침, 부분적인 데에 사로잡히는 것도 집착심으로 나타난다.그렇다면 나는 지금 내가 보는 것을 과연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가. 예를 들어 우리는 보통 무지개는 일곱 가지 색이라고 말한다
구글, 아마존, 인텔, 맥킨지, 페이스북 등 과 같은 미국의 유명한 기업에서는 직원 연수에 명상을 활용한다. 빌게이츠, 마이클 조던, 노박 조코비치, 오프라 윈프리도 명상을 생활화하고 있다. 이들은 명상을 통해서 조직과 개인의 발전뿐만 아니라, 진정한 행복 에 한 걸음 다가가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왜 낯선 불교의 명상수행에 주목했을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명상의 효과가 과학적으 로 입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명상을 하면 스트레스는 감소한다. 기억력과 창의적 해결 능력은 향상된다. 소화 기능이 개선되고, 혈압은 낮아진다. 감정에
오래 전 검도를 열심히 했을 때 이야기다. 수련을 마치고 나서, 사범님께 물었다. “가장 안정된 자세는 무엇인가요? 어떻게 해야 가장 안정적으로 공격과 수비에 임할 수 있나요?”정확한 워딩이 기억 나진 않지만, 사범님은 이렇게 말했다. “검도에 안정된 자세란 없습니다. 다만 우리 자세를 역삼각형처럼 하면, 비록 불안정하지만, 그 역삼각형이 쓰러지지 않으려고계속 움직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안정될수 있습니다.” 무언가 목표로 하는 것이 있을 때, 우리는 늘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계획을 세울 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모든 계획은 어
자비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최상의 공간이자 창조의 힘이다. 미국 미네소타대학의 한 연구소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강의실 천장의 높이를 2.7미터와 3.0미터로 만든 후에 두 공간에서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를 조사했더니 3.0미터의 강의실에서 학습한 학생들이 우수했다. 한 뼘 남짓의 차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베푼 공간의 자유이다. 쓸모가 없을 것만 같은 공간이 쓸모 있는 유용한 공간으로 빛을 발한 ‘무용지용’이다. 자비의 공간이 확장되면 마치 인드라망처럼 ‘장’의 파동으로 충만해져서 모든 우주 공간에는 특유의 울림이 생
팔정도와 만해광장에서 열리는 행사가 부쩍 늘었다. 후문부터 충무로역까지의 필동 일대도 활기를 띤다. 여전히 코로나19로 유고결석을 신청하는 학생들도 있고, 나 역시 개강 전에 양성 판정과 격리를 경험했기 때문에 여러모로 조심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시점이라는 것은 정부나 학교의 코로나19 대응 전략의 변화나 식당과 지하철의 늦어진 운영시간 등을 보면 피부에 와닿는다. 만약 우리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면 그 새로움이란 아마도 인간과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공존이 아닐까? 과거의 두 시점을 떠올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 소설의 제목이다. 다소 철학적인 이 의문은 가을이 다가오는 이 시절에 자문해볼 주제이기도 하다.이 질문의 답을 동서양의 종교인과 철학자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붓다의 답변을 듣기 전에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답을 들어보자. 그는 인생의 궁극목적인 행복과 관련있다 답했다. 그는 무엇이 행복인가에 답하기 전에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것에 대해 말한다.먼저 쾌락이다. 우리는 오감으로 쾌락을 느낄 때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쾌락은 일정한 욕구가 채워지면 그 이상 즐거움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학교의 좋은 점은 학교 곳곳에 좋은 글귀들이 많다는 것이다. 얼마 전 우연히 본 『화엄경』 구절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내 것이라고 집착하는 마음이 갖가지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본이 된다. 온갖 것에 대해 취하려는 생각을 가지지 않으면 마음이 편안하여 마침내 근심이 없어지리라.” 소유에 대한 집착 중 우리를 가장 저열하게 만드는 것은 권력일 것이다. 권력에 대한 집착만큼 우리를 미치게 만드는 것이 또 있을까.권력의 남용하면 바로 떠오르는 요즘 말이 ‘갑질’인데, 갑질은 권력에 대한 그릇된 집착에서 비롯된다. 스스로를 ‘갑’이라
기다리던 대면 수업 재개로 학생들을 강의실에서 만나게 됐다. 캠퍼스에 봄기운이 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동굴 같던 지난 2년을 떠올리면 참 기쁜 일이다. 분위기에 취해 작은 소원을 빌었다. 바로 연등회에 참석하는 것이다. 연등회는 등불을 밝혀 부처님의 탄신을 축하하는 행사다. 불교에서는 어둠을 밝히는 등불을 세상을 밝게 보는 지혜에 빗댄다. 부처 활동 시기부터 연등 공양은 매우 중요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연등에 관한 우리나라의 기록은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전통과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도 등재됐다.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