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 문화유적 답사 특집 -
우리학교 소비자 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이 조합원 복지차원에서 주최한 ‘고구려 문화유적 답사’가 지난해 12월 13일부터 5일간 진행됐다. 중국과 북한의 접경지역 및 심양지역의 고구려 문화유적 답사가 주 내용을 이룬 이번 여행에는 학부 학생 5명, 대학원생 2명, 생협 직원 4명, 직원 2명, 교수 2명, 가이드 1명 등 총 16명이 참여했다.
아래 글은 답사에 참여한 장시기(영어영문학) 교수의 기행문을 요약한 것이다. 편집자

오후 4시 30분, ‘인천 발 단동 행’ 페리호에 올랐다. 우리는 짐을 풀고 갑판으로 나갔다. 배가 출발하기도 전에 어둠이 배를 휘감는다. 순간, 아쉬움이 뇌리를 감싼다. 멀리서나마 북한 땅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배는 이튿날 아침 9시에 단동에 도착했다. “북한 땅이 보인다!”라는 동료의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갑판에 나가보니, 보슬비가 내리는 바다 너머로 몇 개의 섬들과 낮은 산들이 보인다. ‘저 곳이 북한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낯설음, 그러나 친근한

버스에 몸을 싣고 단동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압록강을 따라 이어져 있는 강변길이다. 심양에 살고 있는 조선족이라는 현지 가이드는 강 너머에 있는 곳이 신의주라고 말한다. 버스는 압록강 공원에서 멈췄다. 마치 한강 강변 북부에서 남부를 바라보듯 강 건너에 있는 신의주는 나의 눈 속으로 가득 들어올 만큼 가깝다.
예약된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깜짝 놀랐다. ‘평양 금릉식당’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는 양 옆에는 인공기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고, 문을 열어주는 한복을 입은 두 여자의 가슴에는 ‘친애하는 지도자’라고 새겨져 있는 ‘김정일 뱃지’가 달려있다. 평양에서 직접 운영하는 북한 식당이란다.
“환영합네다!”라고 말하는 북한 여성의 목소리는 너무나 아름답고, 누군가가 “정말 예쁘십니다”라는 말에 “남남북녀라고 말하지 않습네까?”하면서 얼굴이 붉어지는 모습은 어렸을 적 보았던 우리 마을 옆 집 누나의 모습이다. 식사를 마치자 음식 서비스를 하던 여성들이 무대에 올라 환영공연을 한다. 우리는 긴장을 풀고 사진을 찍으며 박수를 쳤다. 공연을 마친 그녀들과 함께 사진도 찍었다.
‘평양 금릉식당’의 감동은 오래갔다. 중국 만리장성의 동쪽 끝자락이라는 ‘호산산성’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북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우리를 즐겁게 했다.
호산산성에 도착해 조선족 가이드는 산성입구에서 북한 땅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며, 성채 뒤편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초라한 시골집을 한 두개 지나 조그만 개울 앞에 멈춘 가이드는 개울 건너가 북한 땅이라고 말한다. 개울은 펄쩍 뛰면 넘어갈 수 있는 곳이다. 믿기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개울 옆에 있는 비석에는 ‘중조국경지역’이라는 글씨가 아주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일행이 반쯤 되돌아갔을 때, 누군가가 멀리 있는 조그마한 건물에서 나왔다.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 속에서 희비를 교차한다. 호산산성이 눈에 들어올 리 만무다.
호산산성은 만리장성의 동단 기점으로 아주 단아하게 복원되어 있었다. ‘호산’이라는 이름은 산의 형상이 마치 누워있는 호랑이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러나 산성을 오르면서 나의 시선은 끊임없이 산성 너머로 보이는 북한 땅을 향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다시 버스에 탑승해 단동을 포함한 ‘요녕성’의 수도인 ‘심양’으로 향했다. 심양은 우리에게 ‘봉천’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봉천이라는 이름은 일본이 만주국을 설치하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하니 일제 식민지의 잔재는 이곳에도 남아있다는 생각을 한다. 심양은 일제 식민지 시대 독립운동의 중심지이고, 시인 윤동주의 고향이기도 하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단동-심양 간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고속도로가 얼어서 진입을 차단해 트럭이나 버스, 자가용들이 모두 되돌아가고 있다.
현지 가이드와 중국인 운전기사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더니 버스를 되돌린다. 그리고 국도가 위험하니 기차로 심양까지 이동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한다.
우리 일행은 기차를 타고 심양으로 이동했다. 배를 타고, 버스를 타고, 그리고 기차를 타게 된 것이다. 정해진 좌석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중국인 여행객들과 뒤섞여 앉았다. 이미 자리를 잡은 학생들은 중국인들과 대화에 열중이다. 중국어를 모르지만 나름대로 알고 있는 한문으로 ‘필담’이 가능하다.
우리는 그리 지루하지 않게 3시간의 기차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역 앞에는 이미 현지 가이드가 연락한 대형버스가 주차돼 있다. 심양은 마치 상하이나 베이징처럼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인 거대도시이다. 그러나 도시는 쾌쾌한 석탄냄새로 가득하다. 우리가 타고 왔던 기차도 증기기관차였다. 버스로 이동하다보니 한글 간판이 널려있다. 현지 가이드는 그곳이 전통적으로 조선족들이 모여 사는 ‘서탑가’라고 이야기한다.

방치되고 있는 고구려 유적

아침에 일행은 고구려의 천리장성 중 하나인 ‘백암산성’으로 떠났다. 백암산성은 천리장성 중에서 그나마 온전히 남아 보존되어 있는 곳이란다. 북경과 마찬가지로 심양 일대는 산이 거의 보이지 않는 거대한 평원이다.
시내를 빠져나오니 전형적인 중국 농촌풍경이 나타난다. 어린 시절을 보낸 6, 70년대 초반의 충청도 마을과 닮아있다. 길거리에는 우리나라의 거리에서 이미 사라져버린 삼륜차(혹은 시발택시)와 마차가 즐비하다. 현지 가이드는 중국 여행의 특이한 점은 들이나 산에 거의 무덤이 없는 것이란다. 등소평이 자신도 ‘화장’을 함과 동시에 모든 국민이 죽으면 ‘화장을 하는 것’을 법으로 정했기 때문이란다.
백암산성에 도착한 우리는 산성이 무너져 내려 방치된 채로 아무런 보존도 하지 않은 모습에 너무 놀랐다. 어제 보았던 호산산성의 모습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이런 모습이니 중국이 나름대로 ‘동북공정’을 내세울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산성을 오르는데, 길은 얼어있고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은 살을 에는 듯하다. 너무 추워서 산성 길의 10분의 1도 오르지 않고 일행은 뒤돌아섰다. 산성 아래로 보이는 중국 농촌마을의 모습은 너무나도 평온하다. 그러나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 집 저 집이 모두 빈 집이다. 심양으로 직장을 구하러 간다는 기차에서 만난 한 중국 청년처럼 사람들이 도시로 이동하는 것이 오늘날 중국의 모습이라 생각하니 슬프기 그지없다.
백암산성 답사를 마치고 다시 심양으로 향하는 길은 중국의 농촌과 작은 도시들을 좀 더 살펴볼 수 있어 좋았다. 우리의 읍내 정도 되는 어느 도시의 한복판에는 길거리 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꽤나 복잡한 풍경이다. 버스에서 내려 중국의 시골장터 모습을 이리저리 구경하고픈 마음이 간절하다. 미국이나 유럽을 여행하면서 느끼는 낯설음과 나 자신의 왜소함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서 체 게바라가 남미여행을 하듯 우리의 젊은이들이 미국이나 유럽을 여행하기 전에 한반도의 풍광을 먼저 살펴보고 아시아를 여행하는 것이 순서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들이 오직 미국이나 유럽으로 향하는 것은 남북 분단 이후 우리의 제도와 삶, 그리고 개개인의 생각들이 모두 미국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마치 ‘괌’이나 ‘하와이’처럼 미국에 붙어있는 하나의 섬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대륙에 붙어있는 중국을 배나 비행기로 오고 가야만 한다.
심양 시내에 접어드니 삼성이나 LG 간판이 눈에 띠게 많다. 우리는 ‘심양고궁’을 방문했다. 심양고궁은 금나라의 왕 ‘누루하치’가 명나라를 치고 청나라를 세우기 이전의 수도이다. 그래서인지 심양고궁은 마치 북경에 있는 ‘자금성’의 축소판인 듯하다. 도시 한 가운데에 있는 고궁은 옛날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현지 가이드는 심양고궁의 건축양식이 만주족과 몽골족, 한족의 방식이 융합돼 있다고 설명한다. 마치 자금성이 보여주는 중국식 건축양식과 경복궁이 보여주는 조선식 건축양식의 중간인 듯하다.
15일 저녁 일행과 고급 한식당으로 보이는 ‘모란봉 식당’에 갔다. 평양을 방문해 ‘단고기’를 아주 맛있게 먹었다는 황상익 교수(서울대)와 박거용 교수(상명대)의 말이 기억나 ‘단고기(탕)’와 ‘소라구이’, 그리고 ‘들쭉술’을 선택했다.
이 곳의 공연은 이전의 ‘금릉식당’보다 더 프로페셔널한 공연에 가까웠다. 특히 전자 피아노와 가야금의 합작 공연은 서구의 음악과 우리의 음악을 혼합하려는 노력이 두드러졌다. 노래를 하고, 피아노를 치고, 가야금을 타는 저들의 모습도 한복을 곱게 차려 입었을 뿐 캠퍼스에서 만나는 우리 여학생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나는 무대에 오르는 여성과 함께 ‘서울에서 평양까지’라는 노래를 불렀다. 가사가 약간 다르고, 프로와 아마추어가 함께 부르는 노래였지만 정말 신명나게 불렀다. 공연이 끝나고 모든 손님들이 나간 후까지 우리는 즐겁게 이야기를 하며 심양의 마지막 밤 시간을 모란봉 식당에서 보냈다.

가까워도 못 밟는 우리 땅

아침 기차를 타고 단동으로 향했다. 단동의 압록강 강변에서 중국 유람선을 타고 한국전쟁 기간에 미군의 폭격으로 무너진 압록강 철교 밑을 지나 위화도 주변을 돌아 신의주 쪽에 있는 강변 가까이에서 신의주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유람선은 배에서 펄쩍 뛰어내리면 신의주 땅에 닿을 정도로 가깝게 접근했다. 멀리 강변 언덕에 북한 사람들이 보여서 우리 일행은 손을 흔들며 인사했지만 그들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우리를 바라보기만 한다. 중국을 여행하고, 중국에 있는 고구려 문화유적을 답사하면서 나나 우리 일행은 모두 북한과 북한 사람들을 가슴 한 쪽에 하나의 한으로 지니고 다녔다.
대한민국과 중국이 서로 인정하며 상호 왕래하듯이 2005년에는 남한과 북조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서로 인정하며 상호 자유롭게 왕래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2001년의 ‘6.15 남북공동선언’이 더 많이 실천돼 통일 원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중국의 영토에 있는 단동이나 심양, 혹은 북경이나 상해가 아니라 자유롭게 언어가 통하는 평양이나 개성의 밤거리에서 서로가 서로를 소중하게 인식하면서 북한 음식과 술을 마시며 함께 노래하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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