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소설을 쓸 때, 나는 스스로에게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외롭고 쓸쓸한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든 그의 곁에 최후까지 남아있는 한 사람이 되겠노라고. 그의 귓가에 희망을 속삭이고 그의 차가운 심장에 온기를 불어넣겠노라고. 그러니까 나는 소설이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우울한 날들의 연속이다. 많은 이들이 스스로 삶을 접고 있는 시대다. 물론 그 가운데 유독 시선을 사로잡는 건 유명인들의 자살이다. 생전의 그들에게 드리워졌던 빛의 장막이 걷히면서 우리는 인간 그 자체의 고독을 엿보게 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어디 유명인뿐이랴. 파산한 사람들, 실직한 사람들, 미래를 저당잡힌 사람들,  우리 주변에서 함께 호흡하며 살던 이들이 아무런 기약도 없이 훌쩍 떠나고 있지 않은가. 뒤늦게 우리는 그들의 우울증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음을,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지 못했음을 자책하면서 한편으로는 지금 내가 감당해야 할 고통의 정체를 숙고해 보기도 한다.

우울증이란 우울한 상태가 계속된다는 의미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기쁨을 느끼는 능력을 상실한 상태의 지속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기쁨을 느끼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어느 한 순간에 잃어버린 게 아니다. 조금씩, 천천히, 그리고 끈질기게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어느 날 우리는 완벽하게 잃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소설가로서 내가 매번 맞닥뜨리는 현실은 무기력한 나 자신이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는 회의가 생긴다. 결국 견고하다 여기며 여태 써왔던 나의 문장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모습을 속절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견디는 이유는 소설 또한 반성의 한 형식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호러스 월폴은 ‘세상은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희극이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비극’이라고 했다. 우리가 세상을 가소롭다고 생각하든 서글프다고 느끼든 어차피 세상은 그런 방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생각하고 느끼는 것, 그게 바로 반성의 시작이다. 내 안의 외로움을 꺼내보면 다른 이들의 그것과 무척 닮아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 고독한 인간임을 인정한다면, 세계가 희극이든 비극이든 무슨 상관이랴. 최선을 다해 반성하기, 그건 소설가의 각오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삶을 살아낸 우리의 자세도 그러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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