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만큼 인간의 욕망을 철저히 분석하고 경계한 가르침은 흔치 않다. 보통 삼독심(三毒心)이라고 말하는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기능은 인간욕망의 근원이다. 사람들은 이 덧없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서로 미워하고 사랑하며 갖가지 사연을 만들어간다. 따라서 초기불교는 이 욕망의 해방을 해탈로 간주한다.
그러나 과연 욕망의 근절이 가능할까. 만약 삶에 욕망이 없다면 ‘성취’는 있을 수 없다. 욕망은 수단일뿐, 그 자체로서 악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에 대한 불교의 해답은 바로 ‘절제’이다. 욕망은 마음이 가진 다양한 기능의 한 부분일 따름이다. 따라서 마음은 욕망에 비해 보면 상위개념이다. 그런데 욕망의 노예가 된 사람들은 이 주객(主客)을 뒤바꾸어 버린다. 그래서 끝없이 다투고, 미워하며, 또 그것을 정당화 시키는 악의 윤회를 거듭하는 것이다. 인간이 이 욕망의 굴레 속을 헤매는 것에 대한 불교의 비유가 바로 갈애(渴愛)이다. 이 갈애라는 말의 원어는 탕하(Tancha)이다. 그 뜻은 ‘목마른 자가 물을 구하는 애타는 심정’이다. 여러 절실한 생의 단편들이 있지만 이보다 더 직접적인 고통이 없다. 욕망에 눈멀게 된 순간부터 우리는 이 갈애의 심부름꾼이 된다. 다가오는 지방선거에 눈먼 이들, 대선에 들뜬 이들, 또 사랑과 출세에 온 인생을 거는 이들 또한 결국 이 갈애의 노예일 따름이다.
대승불교에 들어 서면서 ‘욕망의 단절’이라는 메시지는 서서히 ‘조절’로 바뀐다. 즉 그릇된 욕망을 향한 갈애가 선한 보살행의 추구쪽으로 방향 선회가 이루어진다. 수행의 목표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자리(自利)며 이타(利他)이다. 욕망을 조정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는 지성이다. 이지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세이다. 그러나 지성에는 언제나 이기성이라는 개연성이 덮혀있다. 따라서 자신에게만 너그럽고, 타인에 대해서는 냉철한 이중구조를 갖게된다. 사실은 그 거꾸로여야 한다. 그때 필요한 덕목이 수행이다. 참선도 수행이고, 염불도 공부이다. 기도도 방편이고, 보살행도 역시 수행이다. 불교공부의 마지막은 결국 수행에 있다. 하루 한순간일지라도 정신을 집중한다거나, 작은 선행하나를 실천하는 일이 바로 현대인의 수행이다.

정병조
문과대학 윤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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