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는 누군가에게 물어본 내 모습은 그런 식이다. 소란스럽고, 떠들썩한. 이런 모습은 비단 대화에만 나타나지 않는다. 소란스러운 사람은 글에서도 그 모습이 드러난다. 따뜻하고 세밀한 감정도, 주인공의 대화 속 스쳐 가는 조연까지도 온전히 묘사하려 애쓴다.소란스러운 사람은 그런 이유로-어쩌면 필연적으로-글을 좋아하게 된다. 글은 입체적이고 장황한 감정과 상황도 평면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나는 글이란 감정을 머금을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생각했다. 불쾌한 상황을 한 걸음 떨어져 보게 하는 건 글이 고유하게 가진 의미다. 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내가 기자라는 것. 기사를 쓴다는 것. 그 글이 신문에 기록된다는 것.돌이켜보면 참 나답지 않은 선택이었다. '누가 볼까'하는 불안함에 눅눅한 일기장 속 잉크 한 방울을 남기지 못했는데. 많은 동공이 내 글의 활자 하나하나를 바라본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그럼에도 동대신문에 지원했다. 기자가 되기 위한 발걸음이라든지 대학을 위한 봉사 정신 같은 거룩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서투른 1학년의 조급함 때문이었다. 그래도 조금의 거룩함이라도 가져갔어야 했나? 타자 소리만으로 신문을 대하는 그들의 진심의 내음이 가득
꿈속에서의 나는 늘 어설프다. 걷고 뛰는 것과 같은 간단한 동작도 꿈을 꾸는 중에는 생경하게만 느껴진다. 단단한 땅에 발을 내딛으려던 찰나 발밑이 무너지고 나는 아주 우스운 모양새로 추락하고야 만다. 알고 있던 것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켜 흐려지고 바람 앞 등불처럼 맥없이 흔들리는 내 모습만이 선명해지는 꿈이어야만 했던 경험. 수습기자로서 보낸 지난 한 학기가 그랬다. 깨려야 깰 수 없는 긴 꿈 같았다. 동대신문에서의 수습 생활은 온통 망설여지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내가 상상한 학보사 기자는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나는 영민하고 능숙
지난 여름방학, 동대신문 수습기자 모집 공고를 읽었다.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는 나였고, 기사 작성에 자신이 있던 나도 아니었지만, 무엇이든 일단 해보는 새내기의 겁 없는 패기로 무작정 지원서를 제출했다. 필기시험과 면접을 봤고, 다음날 합격 문자를 받았다. 합격 문자를 받았을 때는 그저 너무 기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앞으로 나에게 어떤 나날이 닥쳐올지는 상상도 못 한 채 말이다.선배에게 첫 피드백을 받았을 때가 기억난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냉정하고 자비 없는 피드백이었다. 한글 파일을 자비 없이 가
진중함보단 가벼움과, 글보단 말과 어울렸던 사람이었다. 깊이 있는 소통은 글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글로 나누는 소통을 가장 어려워했지만, 글을 통해 진정한 소통을 이루고 싶었다. 동대신문 기자 활동은 그런 나에게 둘도 없는 경험이란 생각이 들었고 큰 망설임 없이 입사 지원서를 제출할 수 있었다.하지만 수습기자의 글쓰기는 생각보다 더 조심스럽고 어려웠으며, 무서웠다. 내가 쓰는 글 한 자 한 자가 매일 밤 머릿속을 지배했고 가끔 컴퓨터 속 깜박거리는 커서가 위협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기사는 내가 흔히 써 왔던 글과는 다르게 무거웠
이름 뒤 호칭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학창 시절 영상 제작에 몰두했던 나는 내 삶이 당연히 미디어학과에 진학해 PD가 되는 길을 향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꿈은 17살 무렵, 졸작으로 한 영상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내 이름 뒤 감독이란 호칭이 붙은 뒤 흔들리기 시작했다. 타인보다 스스로의 평가가 중요한, 성취를 그 자체로 즐기지 못하는 성격 탓에 부족한 내용물로 얻은 결과와 주위 사람들이 장난스레 부르던 ‘감독’이라는 호칭은 내게 부끄러움과 좌절감으로 다가왔다. 준비되지 않은 채 얻은 결과는 독이 됐고, 이를 계기로 나
처음 무언가를 시작하는 일은 어렵다. 초등학교 2학년 달리기 경주 날, 발이 느린 나는 첫발을 내딛지 못하고 아픈 척 경주를 포기했던 기억이 있다. 독서실 책상에 앉아 영어 모의고사를 풀기 전, 문제가 읽히지 않을까 무서워 시작된 스톱워치를 여러 번 리셋한 경험도 있다. 나는 늘 ‘처음’이 두려웠다.처음을 두려워하던 나는 동시에 욕심이 많은 아이였다. 남들보다 1년 늦게 입학해 ‘성취’에 조바심을 내던 시기, 하루라도 빨리 수능특강 속 피상적인 정보들에서 벗어나 명확하고 구체적인 세계로 도달하고 싶었다. 이런 갈증을 학보사에서 해소
나는 쓰는 일과 달리는 일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글을 쓴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보통 방 안에 앉아 골몰하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의자를 떠나지 않을 결심은 글쓰기에서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무언가를 써내려가기 위해선 우선 달리는 자세부터 갖춰야 한다. 등과 허리를 곧게 펴고, 배에는 살짝 힘을 주고, 팔은 앞뒤로 가볍게 흔들면서 나아가는 동작으로부터 문장은 시작된다. 뒤꿈치부터 부드럽게 착지하는 힘. 힘껏 지면을 차내는 발끝. 그리고 달릴수록 달라지는 풍경을 포착하는 눈빛. 길을 잃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아가는 대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소설 에서 천선란 작가는 이런 메시지를 던졌다. 수습기자로서 활동하는 동안 느꼈던 감정이 이 한 문장에 함축되어 있다. 처음 ‘수습기자’라는 직책을 달았을 때는 빨리 나아가고 싶었다. 기자는 어떤 글을 써야하는지 생각해보지 않고 그저 ‘잘’ 쓰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몸과 마음의 엇박자는 많은 실수를 만들었다. 문장 배열은 엉망이고, 기사 같지 않은 리드와 부족한 어휘력. 이곳에서 정기자가 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 그렇지만 도망갈 곳은 없었다. 한 번 수습기자가 된
스무 살의 나는 뜨거웠다. 할 줄 아는 건 없지만 하고 싶은 게 많아 일단 도전은 하고 보는 타입이었다. 배워나 가면 충분히 괜찮을 거라는 생각 하나만 갖고 여러 가지 일을 시작했다. 대학교에 들어오고 나니 개인 시간이 늘어났고, 그 시간들을 알차게 활용하고 싶어 대내외활동, 아르바이트 등 다양한 일을 병행하기로 했다. 그렇게 나의 스무 살은 놀이공원부터 시작된다. 아르바이트라곤 해본 적 없던 내가, 놀이공원에서 아르바이트 해보는 게 소원이라며 하루 매출 1,000만 원이 넘는 놀이 공원에서 일했다. 일이 미숙해 하루는 햄버거 12
“서원아 일어나, 신문스크랩하자”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첫날, 그렇게 나는 신문과 만났다. 처음 마주한 그날은 신문이 너무 어려웠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너무 어른의 말들 같아 이해하기 힘들었다. 눈앞의 신문만 해치우면 더이상 읽을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꾸역꾸역 읽었다. 하지만 신문은 다음날도, 그다음날도 아침마다 현관문을 열면 그 자리에 새롭게 도착해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동안 신문스크랩을 하면서 몰랐던 세상에 눈을 떴다. 말도 내용도 너무 어려웠지만 하나의 신문을 다 읽은 후 얻게 되는 것들, 새로운
시작과 끝, 처음과 마지막. 양단에 놓여 있다고 여겨지는 개념까지 이어주는 시간 덕에 수습기자도 어느덧 끝을 앞두고 있다. 시작의 동기는 거창하지 않았다. 새내기라는 창을 썩히고 싶지 않던 스물의 패기와 기자라는 진로에 대한 흥미가 혼합된 결과였다. 가벼운 손놀림으로 수습기자 지원서를 제출하고, 지원 당시보다 무거워진 손짓으로 필기시험을 치르고,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면접을 봤다. 그렇게 겁없던 스물의 손에 시작이 쥐어졌다.‘첫’이라는 관형사가 유별나지 않은 시기였기에, 시작의 첫 감촉은 거칠다기보다 매끈함에 가까웠다. 하지만
다들 살면서 다시 해달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무언가를 다시 해달라는 말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한테는 그다지 달가운 말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시절, 교지편집부였던 나는 웬만한 글쓰기에는 자신이 있었다. 학교 논술형 시험, 논술, 글짓기 대회 등 별 고민 없이 글을 써 내려갔었다. 그 당시 글 쓰는 것이 부담으로 다가왔다기보다는 쉽게 끝낼 수 있는 업무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사실 동대신문에 지원했을 때도 별 고민을 하지 않았다. 나는 잘 해낼 것이라는 확신이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나에게 흥미와 적성을 물어보면 항상 글쓰기라고 답했다. 글을 쓰는 것이 재미있었고 종종 듣는 칭찬이 나의 흥미를 더욱 돋웠다. 자연스럽게 글을 쓰는 직업을 진로로 고민하게 됐다. 작가, 칼럼니스트, 기자 등등. 그중에서 기사를 써본 경험은 전무했다. 때문에 기자의 생활은 작가가 대본을 쓸 때와 어떻게 다른지 항상 궁금해왔다. 그러다 학보사 수습기자 모집 공고를 봤고, 기자의 생활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일 뿐 아니라 글쓰기를 좋아하는 내가 즐겁게 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학보사에 지원해 수습기자 생활을 시작했다.오
나는 내가 올림픽에 나갈 줄 알았다. 그러나 부상으로 10년 동안 하던 스피드 스케이팅을 그만둔 나에게 남은 건 수없이 기록했던 랩타임뿐이었다. 인생의 절반을 운동밖에 하지 않은 탓인지 그동안 본 운동선수가 아닌 유일한 직업은 나를 인터뷰하던 기자뿐이었다. 그렇게 아는 직업이 기자뿐이었던 나는 더 이상 랩타임을 기록할 수 없다면 나를, 우리를, 그리고 세상을 기록하는 기자가 되기로 했다.미디어 커뮤니케이션학과에 진학하고 경험한 기자는 낯설었다. 익숙하지 않은 단어와 문장들 사이에서 빠르게 글을 써 내려가는 동기들을 보면서 나는 내가
"배우는 건 눈물 나는 일이야”, 일전에 운전을 배우던 지인이 내게 한탄하며 전한 말이다. 지인은 운전 배우는 일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내가 운전을 배우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말에 공감하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나 역시도 인생을 살아오며 무엇인가를 배우는 일에 데인 상처가 많았기 때문이다. 다섯 살 즈음 미숙한 젓가락질을 단련하다 울기도 했고, 열 살 즈음 매일 같이 한문 필사 숙제를 내주신 학습지 선생님에게 큰 불만을 가지기도 했다. 나름대로 정신이 굳세어진 스물에 이르러서도 익숙하지 않은 대학 문화와 공부를 알
낯선 정취 속을 헤매는 3월, 경외감 속에서도 익숙함을 찾아갔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 삼자의 시선으로 내 삶을 바라보게 된다.사람의 눈을 관찰하는 것보다 동공 없는 텍스트와의 대화를 즐겨했다. 기어이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을 굴절시키는 나라서, 중학교 시절부터 이름 뒤에 붙어 있던 기자라는 수식어가 어색했다. 내가 생각하는 기자의 자질 중 일부인 주변을 흡수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또한, 오직 나의 독백만이 나의 대기를 움직이고 계절을 순환시켰다. 기사를 쓰는 일은 그런 나를 은닉했다.아무렇지 않은 척 겉으로 대담한 체하는 것만
작년 여름, 동대신문 합격 문자를 받았다. 긴장한 탓에 면접을 망쳤다고 생각했는데 감사하게도 한 학기 동안 수습기자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고등학생 때 영자신문부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었음에도 수습기자 활동은 차원이 달랐다. 쉽지 않았다. 솔직히 힘든 과정의 연속이었다. 좋은 아이템을 정하는 것부터 칼럼 기고를 요청하는 것까지. 수습기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꼽으라면 인터뷰 기사를 작성했던 일이다. 해당 기사를 작성하기 전과 후로 수습기간을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이전에는 문체가 깔끔하지 못했다. 기사체에 대한 적응기간이 필요
2014년에 방영된 드라마 피노키오를 보며 나는 기자라는 직업에 관심을 가졌다. 평소 호기심이 많고 궁금한 것은 물어봐야 끝을 보는 성격이었던 나는 기자가 나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때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던 나는 대학에 입학한 뒤 학보사에 지원하게 됐다.수습기자로서 한 학기 동안 외부기고 컨택, 문화 칼럼, 대학부, 기획부 등 다양한 부분에 참여했다. 그중 처음으로 맡게 된 외부기고는 설렘도 있었지만 꽤나 무거운 책임감도 있었다. 정해진 마감일까지 원고를 받지 못한다면 신문 인쇄를 하지 못해 차질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
고등학생 때부터 기자를 꿈꿔왔기에 대학교에 입학하면 꼭 학보사에 들어가 기자를 간접적으로 경험해 보고 싶다고 다짐해왔고 망설임 없이 동대신문에 지원했다. 간절함을 알아주셨는지 신문사에 들어갈 수 있게 됐고 갑작스러운 상경으로 많은 환경적 변화를 겪게 됐다.신문사 활동을 시작하고 기사를 잘 쓰고 싶은 마음에 많은 노력을 했다. 평소 ‘어떤 기사를 쓰면 좋을지’, ‘요즘 사람들이 어떤 이슈에 관심이 많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신문도 이전보다 자주 읽고 여러 언론사의 뉴스를 보며 시사 이슈를 자주 접하게 됐고 자연스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