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먹고사는 거의 모든 문제는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처리된다. 시장은 그것이 호화로운 백화점 명품관이건 지하철역 구내에서 모르는 상대를 기다리는 “당근”이건 간에, 적어도 거래가 성립하는 그 순간에만은 자발적인 참가자들 사이의 평등한 교환으로 보인다. “평등하다”가 아니라 평등하게 “보인다”라고 쓰는 까닭은 바로 그 거래가 성립하는 순간으로부터 그 이전으로 시점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처음과는 다른 상(像)이 우리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주머니 속 사정을 헤아려 사고 싶은 비싼 재화를 포기하고 어쩔 수 없이 값싼 대체물로 향할 때,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고급의 취향을 계발할 환경에서 자라지 못한 탓에 “저급한” 상품의 소비로 향할 때, 그 소비는 자발적인 것인가 아닌가? 요컨대 구조 대 개인이라는 사회과학의 영원한 숙제는 여기에서도 유효한 것이다. 우리는 늘 구조와 개인, 자발적인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사이에 넓게 펼쳐진 스펙트럼 속에서 시장에 참가한다. 이를테면 70%의 자발성과 30%의 구조, 혹은 90%의 구조와 10%의 자율 사이에서 끊임없는 왕복운동을 하는 것, 그것이 철학적으로 고찰한 우리의 시장 활동인 셈이다. 

시장과 아주 잘 어울리는 개념 짝은 경쟁이다. 선거에 비유하자면 입후보자가 유권자의 표를 갈구하듯 소비자는 원하는 상품을 갈구한다. 입후보자가 당선되기 위해서는 최다 득표를 해야 하듯이,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최다 금액의 화폐를 지불하겠다는 의사와 능력을 제시해야 한다. 정확히 여기에서 그쳐야 할 유비는 더욱 확장된다. 득표수가 적은데도 당선된다면 부정선거이듯, 투표를 거치지 않고 권력자 마음대로 임명한다면 민주주의로 간주되지 않듯, 최고의 지불 의사와 능력을 가진 이가 원하는 상품을 손에 얻지 못하는 것은 부당한 일로 여겨진다. 시장 안에서 경쟁하는 것이 가장 공정하면서도 민주적인 경쟁의 형태로 받아들여진다. 

시장은 원래 효율성의 달성을 목표로 삼는, 그리고 그것을 가장 성공적으로 해내는 메커니즘이다. 효율성이라는 개념 자체도 누구의, 무엇을 위한 효율성인가에 따라 여러 가지로 정의될 수 있다. 문자메시지 한 통으로 해고해도 될 자유는 고용주에게는 지극히 효율적이지만, 그것이 해고당하는 피고용자는 물론 사회 전체적으로도 과연 효율적인지는 불분명하다. 어쨌건 간에 시장은 나름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조직일 뿐 공정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정확하게는 아예 관심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다시 예의 유비로 돌아가자면, 인종주의자의 한 표나 민주시민의 한 표가 등가이듯, 부자의 1원과 가난한 이의 1원은 등가이다. 시장은 민주적이지도 않다. 1원 1표가 통용되는 시장에서는 민주주의의 가장 느슨한 형식적 정의인 1인 1표조차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장을 통한, 혹은 시장에서의 경쟁이 가장 공정한 것이라는 착각은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누구에게나 투명하게 잘 보이는 형태로 승부가 결정된다는 의미에서의 효율성을 공정성으로 혼동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때로는 불공정의 온갖 원인을 촘촘하게 분류하는 것이 어렵다는 이유로, 그리고 그렇게 분류된 원인들을 걸러내기는 더 어렵다는 점 때문에, 또 때로는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라는 철학적(?) 이유 때문에, 어차피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나마 시장이 차선 혹은 차악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 따름정리는 시장의 작동을 방해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모든 것은 경쟁의 공정성을 해친다는 믿음이다. 

그런데 정작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비유로 자유시장주의의 시초를 열었다고 간주되는 애덤 스미스는 또 하나의 저서인 『도덕감정론』을 다음과 같은 단락으로 시작한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그 천성에는 분명히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가 존재한다. 이 천성으로 인하여 인간은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즐거움 밖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스미스가 얘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타인의 처지에 대한 공감(sympathy)이고, 그것은 무엇이 정의로운가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형성하고 규제함으로써 세상을 그나마 견딜 만한 곳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다면 공감은 시장경쟁이 가져다주는 효율성의 배후에 놓인 근원적인 가치를 살필 수 있게 해주는 필요조건이기도 할 것이다. 

오래전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정의나 평등, 공정에 대한 감각을 모조리 원시적 본능이자 사회주의라는 개념으로 몰아버린 바 있다. 바로 그 하이에크가 사상적 구루 역할을 했던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대에 경쟁의 효율성에 대한 신화는 우리 마음속의 시장주의로 자리 잡았다. 스미스가 얘기하는 “이기심과 상반되는 우리의 천성”은 현존하는 물질적 이익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상적 논리에 의해 깊숙이 억압당하고 말았다. 우리 몸에 스며들어 더 이상 이질적인 것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 이데올로기는 그 최고의 형태에 도달한다. 효율성이 과연 누구의 어떤 효율성인가라는 근본적 물음을 던지기는커녕, 공정성이라는 프레임이 효율성의 문제와 뒤섞일 때 오히려 우리의 또 다른 야만적 본능, 즉 공동체를 갉아먹더라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마음은 극대화된다. 

개인의 행동이 사회의 구조와 연결되는 지점, 달리 표현하면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서로 배치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정확히 사회과학은 시작된다. 사회과학적 시각은 미래를 가불하여 현재를 살아가는 방식, 대표적인 예로 기후 위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가리거나 더 나쁘게는 시장의 효율성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가 왜 문제인가를 통찰하게 해줄 수 있어야 한다. 자칫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진부한 반성으로 이어질 위험을 경계하면서 내 마음속의 시장주의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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