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본질은 직업의 취득이나 물질적 풍요, 사회적 명성에 있을까? 먹고사니즘(먹고사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는 태도)이 학문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이 더 나은 직업이나 풍요로운 미래를 상상하며 대학원에 들어왔고, 그들이 대학원에서 생산한 연구와 깨달음의 축적은 인류의 진보를 이끌었다. 그러나 먹고사니즘만이 학문과 세상의 발전을 추동하는 유일한 연료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깨닫는 즐거움, 그것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며 사회에 작은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기쁨. 이것이 학문을 지속하는 본질은 아닐까. 공부를 지속할수록 차곡차곡 지식을 쌓아가는 행복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커진다. 그러나 한국 대학 교육의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배움의 일정한 연령대의, 많은 비용을 지불할 용의가 있는 소수의 연구자에게만 열려있다는 것이다. 대학이 제시하는 조건에 부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시도할 용기조차 내지 못하고 대학 공부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학의 기원은 본디 학위를 취득하는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이 모여 지식을 토론하던 곳이 아니었던가. 대학은 발전하기 위해,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편하게 대학 입구에 다다를 수 있는 사다리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앎과 깨달음, 배움과 연구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사회풍토는 개인과 사회 모두에게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전공과 무관한 다른 생업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학교에 나와 유사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눈빛을 공유하는 것이, 그저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이 즐겁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대학원에 다닐 수도 있다.

  분야를 막론하고 학문공동체는 다양한 구성원이 필요하다. 평생을 한 분야의 연구에 쏟아부은 사람도, 다른 지역에서 시간을 보냈더라도 행복과 즐거움을 통해 해당 분야와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온 사람도 모두 중요하다. 학문공동체의 다양한 인적 구성은 간학문적이고 융합적인 연구를 압박하고 결과적으로 창조적 혁신이 일어날 수 있다.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이 만나,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환류를 인류가 진보해 온 과정의 프레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개인은 행복의 원천으로 학문이라는 별개의 테마를 추가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예상치 못한 성과는 사회를 앞으로 더 나아가게 할 수도 있다. 아니, 사회의 발전은 사실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행복한 개개인이 모여 결국 행복한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행복의 원천을 다원화하려는 시도는 개인이 행복할 가능성을 높이고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마음에 대한 사회의 환대이다. 더 나은 직업이나, 미래를 꿈꾸고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사람뿐만 아니라, 특정한 결과적 목적의식 없이 그저 행복하기 위해서 대학원에 들어오려는 사람을 포괄하려는 시도를 학문공동체가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물리적·심리적 공간을 내어주어야 한다. 행복을 위해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문턱을 낮추고 몸을 기울여 그들이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확보해 주어야 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사람에게 전과 다른 시간적 여백을 부여했다. 기대수명이 양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늘어난 삶의 질적 풍요에 대한 고민이 더 무거운 무게로 개인을 누른다. 주어진 시간을 더 행복하게 보내고 싶은 소망의 한 자락에 학교가 위치할 수 있다. 개개인이 평생 교육받고, 평생 연구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하는 일이 학교가 고령 사회에서 제 몫을 하는 방법일 수 있다.

  대학은 먹고사니즘을 넘어야 한다. 특정 진로에 대해 염두하고 있지 않거나, 고려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자신의 전공에 대한 애정을 교집합으로 하여 학문 세계에 들어와 전문적인 배움과 연구를 진행할 의욕에 호응해야 한다. 대학이 직업인을 양성하는 기관을 넘어, 사람이 평생토록 머무를 수 있는 공간으로의 인식적 재정의를 통해 개인과 사회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바탕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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