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네이버 영화
△ 사진= 네이버 영화

  오컬트 장르의 영화가 가지는 미학은 미지(未知)에 있다. 영화 <엑소시스트>가 만들어내는 오싹함과 두려움이 악마라는 영적인 존재의 등장에서 기인하듯이 말이다. <엑소시스트>의 악마는 소녀들의 몸 안으로 들어가 몸을 변형시키고, 상처입힌다. 엑소시스트의 엑소시즘은 인간의 몸 안으로 들어가 육체성을 탐하려고 한 영적 존재를 바깥으로 꺼내놓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영적인 존재는 인간의 몸을 빌리려 하고 인간의 몸을 통해 자신의 ‘있음’을 드러내려 한다. 죽은 자의 넋, 귀신, 혼이 원하는 것은 그 자신이 ‘현실’의 세계에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을 몸을 지닌 인간들이 ‘목격’을 통해 깨닫는 것이다. ‘몸’이 중요한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미지의 영역에 놓여 있던 영(靈)을 기지(旣知)의 영역으로 옮겨놓는 하나의 수단이자 매개물이 되기 때문이다.

  <파묘>에 등장하는 친일파 조상의 영혼이 봉인에서 풀려난 후 자신의 자손들을 하나씩 찾아가 그 몸을 빌리고자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할아버지의 친일 행위는 장손의 몸을 통해 관객들에게 ‘보여진다.’ 이 ‘보여짐’의 방식이 중요하다. 

  <파묘>는 총 6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기실 이 6개의 구분은 관객에게 일종의 가이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큰 의미를 갖지 않는 것 같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파묘>가 크게 두 가지의 장으로 구분된다는 사실이다. 영화가 형식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관 아래 파묻혀 있던 또 다른 관이 발견되는 순간, 영화는 두 개의 장으로 나뉘기 시작한다. 

  묘를 파헤치면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고, 친일파 할아버지 영혼의 등장으로 네 명의 등장인물(봉길, 화림, 상덕, 영근)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며, 소멸되는 것이 마땅하게 여겨지는 그 영혼은 약간의 위기를 동반하긴 하지만 꽤나 매끄럽게 불에 타 사라진다. 이것이 1장이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파묘>는 감독의 전작 <검은 사제들>이나 <사바하>처럼, 미지의 존재 영(靈)과 맞서 싸우는 방식의 스릴과 긴장감을 자아내는 ‘오컬트’ 영화로 설명되고 끝났을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기 때문에 <파묘>는 독특하다. 영화는 ‘몸’을 빌리고자 하는 영적 존재를 등장시키는 데서 더 나아가, ‘몸’을 원하지 않는, 이미 그 자체로서 하나의 ‘몸’이 되어버린 정령을 등장시킨다. 너무나 명확하게 눈에 보이는 이 거대한 존재를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미지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기지의 존재다. 언제 인간의 몸으로 빙의할지 몰라 두려운 영적 존재가 아니라, 몸을 지니고 있어 눈에 보이기 때문에 두려운 존재. 끌어올려진 두 번째 관과 그 관을 부수고 나온 정령의 등장을 기점 삼아 영화는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이제 네 사람은 굿을 하거나 관을 태우는 ‘의식’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정령과 맞서 싸워야 하는 상태에 놓인다. 관과 함께 파묻혀 있을지도 모를 쇠말뚝을 제거하려고 하거나, 얼굴에 축경을 적거나 하는 간접적 방식의 제거가 제시되기도 하지만, 결국에 그 정령을 물리치는 것은 상덕의 ‘피’로 물든 나무 막대기와 그것을 정령에게 꽂아 넣는 상덕의 물리적 몸짓이다. 1장에서와 같은 간접적인 방식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완전히 ‘밀착’해야만 한다. 

  <파묘>를 보면서 내가 가장 이끌렸던 것이 바로 ‘밀착’해야만 파괴가 가능한 이 일본 정령의 존재였다. 한반도의 척추를 끊어 놓고자 일제 강점기에 은밀히 한반도 땅에 묻힌 이 정령은 그 자체로 ‘일제’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이 일본 정령은 영혼의 형태로 인간의 몸에 들어가지 않고, ‘몸’ 그 자체로서 등장하는 것일까? 영화는 육체를 지닌 정령을 만들어냄으로써 물리적 전투의 현장 안으로 네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이 지점에서 감독이 현재 <파묘>를 둘러싸고 거론되고 있는 반일의 코드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느꼈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오락성, ‘화끈함’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는 감독의 인터뷰에서 엿볼 수 있듯이 <파묘>는 극장 안에서 관객들이 느끼게 될 ‘순간’의 ‘재미’에 초점을 둔 영화다. 정령의 몸이 어떻게 시각화되어 있는가를 보라. 일본의 오니, 또는 흡사 진격의 거인을 연상케 하는 이 강렬한 이미지는 보는 이의 뇌리에 선명히 남도록 구체성을 띠고 있다.

  <파묘>는 미지를 발생시켜 낯선 체험을 제공하는 영화가 아니라 미지를 수단으로 활용하여 기지를 향해 직진하는 아주 명징한 영화다. 영화를 보는 우리가 느끼는 낯섦은 영화 전체를 통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이묘 정령이라는 기이하고도 분명한 대상이 흙 바깥으로 나와 땅을 밟고 걷기 시작했다는 그 사실에서 발생한다.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장면은 없다. <파묘>는 정확하고 분명한 영화다. 보여주지 않는 방식으로 상상력을 자극하거나 여백을 만들어 관객이 체험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두지 않는다. 영화에서 제시되고 있는, 딱 ‘그만큼’만을 체험하게 한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의 재미를 위해 감독이 선택한 방식이 이것 아닐까? 반일 코드는 재미를 위하여 동원되었을 뿐 영화의 근본 성질일 수 없다. 민족, 역사, 반일, 어떤 키워드로도 <파묘>를 정의 내릴 수 없을 것이다. 

  일제의 잔재를 파묘하는 것이 이 영화가 지닌 문제의식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아니, 부정할 수 없는 것을 넘어 그 문제의식은 이 영화를 설명하는 데 있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영화의 핵심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파묘>를 이야기하기엔 영화가 가진 ‘몸’이 너무도 강렬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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