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선진, 『밤의 반만이라도』, 자음과모음, 2024.

△ 사진= 교보문고
△ 사진= 교보문고

  보르헤스의 단편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는 세상 모든 기억의 총합보다 더 많은 기억을 가진 인물 ‘푸네스’가 등장한다. ‘푸네스’의 매우 구체적이고 항구적인 기억은 당장 3시 14분에 본 개의 이름을 3시 15분에 똑같이 불러줄 수 없을 만큼 비옥한 세계를 축조하지만, 정작 그는 그런 자신의 기억을 ‘쓰레기 더미’로 표현한다. 그 표현에는 왜곡의 틈입을 불허하는 완벽한 기억이 오히려 삶의 일반 원리와 공존하기 어렵다는 보르헤스의 믿음이 깃들어 있다. 이렇게 “참을 수 없이 정밀하고 순간적이며 다양한 형태의 세계를 지켜보는”* 자가 겪는 외로움의 필연이 시사하듯, 삶의 능력은 오히려 눈앞의 ‘거시기’한 현실을 ‘믿음’의 방식으로 뭉개보는 데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선진의 첫 소설집 『밤의 반만이라도』는 그런 푸네스의 기억과 보르헤스의 믿음을 동시에 관통하고 있다. 여덟 개 단편을 구성 중인 이선진의 문장은 ‘푸네스’의 기억처럼 가없이 미세하고 핍진한 반면, 그의 인물들은 기억의 해상도를 낮추면서까지 어떤 믿음을 사수하려 무던히도 애쓰고 있는 까닭이다. 그들의 꼿꼿한 믿음은 대체로 현실의 규칙에 흐린 눈으로 일관하는 무책임이나, 자학 또는 자기 기만의 형태를 띤다. 가령 제아무리 찾아지지 않는 분실도서라도 언젠가 돌아오게 돼있다며 분실 처리를 보류하는 도서관 사서 ‘부나’(「부나, 나」), 과거 모질었던 짝사랑 상대의 영정 사진 앞에서 “그래도 그때 네가 잘못했”다는 말을 꺼내어 보이는 ‘나니’(「나니나기」), 딸이 동성 연인과 홀딱 벗고 있는 현장을 목격했으면서도 “분명히 절대 꼭 속옷을 입고 있었다며 박박 우”기는 주인공의 엄마(「고독기」), 재직중인 어린이집 원장의 아동학대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영문’(「무관한 겨울」) 등이 그러하다. 이 믿음들은 인물들의 지난 시간이 그들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견인해왔는지를 짐작게 하며, 믿음이란 사실상 ‘방어기제’의 동의어일지 모른다는 사유의 단서를 남긴다.

  또한 표제작 「밤의 반만이라도」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물 ‘미수’와 그녀의 딸 ‘다운’을 통해 또 다른 결의 믿음을 보여준다. 이는 “내가 본 것이 아니라 내가 보려하지 않은 것”에서 ‘있음’이 변증되는 세계로, 작중 전맹 시각장애인 ‘미수’는 자기 앞에 펼쳐진 까마득한 밤을 오히려 상대를 투시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으로 믿고, 그녀의 밤을 상속받은 ‘다운’은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그 밤의 비밀을 당차게 파헤쳐나간다. 이렇듯 ‘없음’에서 ‘있음’을 길어내는 그들의 변증법적 세계는 주인공 ‘미숙’을 매료시킬 뿐 아니라, 눈을 감은 상태로도 ‘다운’을 볼 수 있게 된 짝사랑의 시작과 함께 그녀의 마음 절반을 차지해버린다. 

  이렇듯 이선진의 인물들은 눈앞에 일어나는 ‘현상’ 그 자체보다, 비가시적이고 추상적인 위력이 내면에 ‘재현’되는 양상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있으나, 그러한 믿음의 견지가 그들에게 반드시 어떤 보상만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도 소설의 결말에서 잘 드러난다. 인물들의 믿음은 종종 배반되고 무용해지는데, 가령 「부나, 나」속 ‘부나’의 확신이 담긴 분실 도서는 끝끝내 오리무중이고, 「밤의 반만이라도」속 ‘미숙’에게 반쪽짜리 사랑을 직감케 했던 믿음은 어느새 ‘다운’과 자신의 밤사이 벌어진 극복 불가능한 간극을 직감케 하는 믿음으로 뒤바뀐다. 「무관한 겨울」속 ‘영문’이 계속 자학하며 감당해야 할 마음의 지옥은 당장 그 끝이 없어 보이고, 나머지 단편 속 인물들 역시 믿음과 무관하게 누군가의 난 자리를 견디며 삶을 지속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을 고이 간직한 채 가던 길을 향해 발걸음을 계속 옮기거나, 입에 음식을 밀어 넣으며 비참을 억누르거나, 여전히 서로인 서로를 견디거나, 아니면 반려 식물을 분갈이해주는 인물들이 그리는 ‘절반’의 결말들은 퍽 다정한 작가의 설계로 읽힌다. 요컨대 이선진의 세계에서는 지금 내리는 것이 ‘눈’인지 ‘비’인지를 식별하는 작업보다 그게 무엇이든 “그냥 맞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덮어두기’식 믿음이 더 유효하기 때문이고, 또 ‘사면’을 에워싸는 슬픔에 가만히 잠식되는 것보다 “슬픔의 기원을 외부로 돌”려서라도 자신의 ‘한 면’을 건져내는 기만적인 믿음이 더 옹호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세계의 양가성을 향해 작가가 던진 ‘물음’(問)으로 시작해, ‘밤’같은 믿음을 ‘묻고’(埋) 뚜벅뚜벅 걸어가는 인물들이 완성시킨 이야기들은 한 때 우리에게 있던 무언가를 되‘묻게’ 만든다. 구석 어딘가에 대충 밀어두고 온 누추한 시절, 몹시 앓았던 탓에 정체도 묻지 못하고 서둘러 중단했던 마음. 그 관계. 어쩌면 약속, 비밀, 또 사랑, 뭐 그런 것들. 이 소설집에서 그 기억의 편린들을 우연히 마주했을 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의 그것들을 행간에 꽁꽁 잘 ‘묻어’두는 것. 우리가 지나온 ‘밤’의 ‘반만이라도’ 의탁해 보는 것.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억의 천재 푸네스」, 『픽션들』, 송병선 옮김, 1997, 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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