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다음 영화
△ 사진 = 다음 영화

 이 영화는 가장 편안한 장소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펼쳐지는 공포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한정된 장소인 부부의 “집”에서 벌어지고 그들은 서로를 치열하게 대치하고 대면한다. 공포를 비롯하는 상대방에게서 도망가는 법이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미스터리 오컬트 영화지만, 이 점에서 보면 절절한 로맨스 영화기도 한 셈이다.

 영화는 여러 장으로 구성돼 있다. 이 구성은 다소 천연덕스럽다. 공포 장르에서 묘사할 수 있는 끔찍한 모습을 수진의 반응으로만 대체하고 간단히 지나가 버린다. 수진의 반려견이 죽는 사고로 수진이 얼마나 불안정해졌는지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출산을 마친 그다음 장으로 간단히 점프한다. 다음 장으로 넘어갈수록 인물들은 점진적이지만, 확실하게 피폐해진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런 가시적인 대비와 이야기의 공백은 관객을 이야기에 더욱 몰입시킨다.  

 기본적으로 오락 영화인 이 영화는 여러 겹의 상징들이 겹겹으로 쌓여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임신”한 수진의 캐릭터에 있다. 스릴러물이나 공포물과 같은 장르 영화에서 임신한 여성이 등장하는 것은 흔한 설정이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Rosemary's Baby(1968)나 한국 영화 중 이혁수 감독의 여곡성(1986)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만, <잠>에서 나타난 임신한 여성은 기존 영화과는 다른 성격과 움직임을 보인다. 앞서 언급했던 영화 속에서 임신한 여성은 임신한 상태 자체의 취약성, 견고한 구조나 체계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묘사된다. 하지만, 수진은 정반대의 양상을 보인다.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수진은 실질적인 가장의 역할을 한다. 수진은 현수와 자신에게 닥치는 일에 경제적, 심리적 해결책을 직접 제시하고 뛰어든다. 몽유병을 앓고 있는 현수가 침낭 안에 들어가 있는 모습은 누에고치를 연상시키며 가정에 있어 전통적 기준에서 벗어난 현수의 사회적 역할을 시각화한다. 수진은 아이와 가정을 지키기 위해 공포와 불협을 만들어 내는 현수를 유리하지 않고 집 안으로 계속 포섭한다. 이 끈질김은 결국 이야기를 파국으로 치닫게 만들지만,  진실의 일면을 슬쩍 보여준다. 끈질기고 견고한 관계에서 불안과 안정은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일면에 관해서다.

 그들의 비상식적인 사회적 역할은 위협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위층 할아버지의 등장을 통해 드러난다. 초반에 등장하는 할아버지의 발언은 그들의 성적인 “부부 관계”다, 뿐만 아니라 후반부 현수의 입을 대리해서 튀어나온 “저런 놈이 뭐가 좋냐”는 말은 기존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남자를 둔 여성에게 향하는 언어다. 위층 할아버지가 수진을 대하는 자세에서 소위 전통적인 가부장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사람을 남편으로 둔 여성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는지 나타난다. 즉, 공략 가능한, 금방이라도 균형이 무너질 것 같은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위층 할아버지가 수진이 혼자 있을 때만 수진과 현수의 집을 찾아와 개인적인 불만을 이야기하는 사실이나 현수에게 위층 할아버지가 빙의가 됐다고 믿는 수진이 현수를 위협하며, 나를 성적인 대상으로 보냐는 대사로 구체화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물음을 던진다. 수진과 현수를 위협했던 것은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형태가 있는 공포인가, 아니면 사회와 공기로 이루어진 심리적 공포인가? 마지막 장면은 현수가 할아버지를 연기한 것인지, 실제로 위층 할아버지의 언어인지 알 수 없다. 이 알 수 없음의 상태는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공포의 비정형성을 상징한다. 우리를 구성하는 공포란 무엇인가, 그 공포는 진정으로 해소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가장을 통해 일시적으로 중지되거나 지연되는 것인가.

 감독은 영화를 통해 질문한다. 영화 속에서 어떤 공포의 모습이 보이는가, 누구의 얼굴에 시선이 머무는가? 아마, 그것이 우리 개개인을 구성하고 있는 공포의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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