잦은 이동과 하염없는 변화, 그리고 허물어지는 경계 속에 서 있는 21세기 현대사회에서 ‘혼종성’은 더이상 낯선 개념이 아니다. 그러나 혼종이라는 단어를 마주한 우리의 태도는 양가적이다. 하나는 단일성(單一性)의 상실을 열등함과 불결함으로 판단하는 시각일 테고, 다른 하나는 이종(異種)의 결합으로 잉태된 다양성과 새로움을 긍정하는 인식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혼종을 인식하는 방법은 둘 중 어떤 것에 가까운가. 아마 혼종을 ‘순혈(純血)의 오염’으로 보는 전자가 일반적일 것이다. 논문의 저자는 한국인이 ‘혼혈(혼종)’이라는 단어에 부정적인 어감을 갖는 이유를 “단일민족임을 강조해 온 국가 서사의 탓도 있지만, ‘인종적 혼성’에 ‘침략과 전쟁으로 점철된 슬픈 역사의 산물(전쟁고아와 혼혈인 해외 입양 등)’이라는 의미를 오버랩하는 한국인의 관습적 사고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같은 시기 많은 공간이 제국주의와 식민지를 경험했으며 타이완도 예외는 아니었다. 타이완은 1895년부터 1945년까지 50년간 대만일치시기를 경험했으며 이때의 집합적 기억은 타이완인들이 혼종적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는 데 영향을 미쳤다.

  영화 《카페 뤼미에르》의 감독인 허우샤오셴도 1946년 중국 광둥성에서 출생한 뒤 이듬해 타이완으로 이주한 경험이 있다. 그의 삶은 늘 타이완이라는 공간과 궤를 함께해 왔으며 허우샤오셴은 타이완이라는 장소에 담긴 서사를 담담히 풀어가는 것으로 호평받는 뉴웨이브 감독이 됐다. 논문의 저자는 타이완의 현대를 묘사한 외국어 영화인 《카페 뤼미에르》를 통해 타이완과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관계를 분석한 뒤 타이완 현대의 혼종과 장소 그리고 정체성에 서사를 부여한다.

  허우샤오셴의 《카페 뤼미에르》에 나타난 혼종성을 논하기에 앞서 간략한 영화 소개를 하고자 한다. 이 영화는 허우샤오셴이 일본 쇼치쿠(松竹) 영화사의 요청에 의해 오즈야스지로(小津安二郞)의 탄생 100주년에 맞춰 만든 헌정영화로, 타이완 출신 감독이 도쿄를 무대로 타이완, 일본 혼혈 배우(요코 역)를 기용해 일본어로 영화를 제작했다는 점이 독특하다. 영화의 내용은 고향을 떠나 도쿄에 혼자 살아가는 일본인 프리랜서 작가 요코(陽子)의 평범한 일상을 나열하는 것이다. 요코는 어느날 고향에 성묘하러 가서 부모에게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린다. 요코의 남자친구는 타이완에 있으며 결혼은 하지 않고 아이를 낳아 키울 계획이다. 부모는 걱정하지만 요코에게 다른 선택을 강요하진 않는다. 작가인 요코는 철도 덕후이자 고서점을 경영하는 하지메(肇)와 친구 내지 호감 관계를 유지하는데, 영화는 지하철을 타고 가다 잠이든 요코가 깨어나 자기 앞에 서 있는 하지메를 발견하고 두 사람이 함께 역사를 빠져나오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영화에 나타난 인간관계는 모두 ‘양가적’이며 ‘혼성적’이다.

  영화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내용은 요코의 임신이다. 저자는 요코의 임신을 일본인과 타이완인 사이에서 생겨난 ‘혼혈’로 설정된 점과 요코가 최근 관심을 갖는 인물이 타이완 출신으로 일본에 와서 활동한 음악가 쟝원예(江文也)로 묘사되는 점을 중요하게 인식했다. 특히 요코는 쟝원예의 흔적을 따라 도쿄 곳곳을 누비는 필드워크 하는데, 저자는 이 행위를 “타이완 출신 쟝원예가 도쿄에 남겨놓은 흔적은 혼종성을 지니는 것이며 요코는 이런 혼종적 공간을 자신의 장소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시말해 요코는 쟝원예의 행적을 찾아다니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 혼종공간을 만들어내어 거기에서 장소감과 소속감, 그리고 정체성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또한 요코는 미혼모로서의 운명을 홀로 감당함으로써 스스로 주체로 일어서려 하는데 이는 허우샤오셴의 80년대 작품 등장인물과 비교했을 때 분명한 적극성을 드러내는 부분이며, 요코의 행위는 근대 이후 줄곧 외세의 지배를 받아온 타이완인들의 혼종적 정체성 수립과 문맥이 서로 닿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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