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무신론에 가까운 유신론입니다.” 지난 여름 조계종에서 만난 한 스님이 해준 한 마디가 이번 여름의 잔상처럼 마음에 남아 있다. 그 스님은 다른 종교인들과의 만남에서 불교의 특성을 설명할 때면 이 문장으로 답한다고 한다. 내가 스님의 의도대로 이해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불심의 상당 부분의 근거도 이 문장에 배어 있다.   

  불교의 역사에서 다른 종교에서 발생한 논란·논쟁이 없는 주제 중 하나가 우상숭배이다. 사전에 따르면 우상숭배는 “신 이외의 사람이나 물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하는 일”을 의미한다. 즉, 종교가 성립되기 위한 기본 요건인 신에 대한 믿음이 신을 향하지 않고 허구로 향하는 것을 경계한다. 다른 종교의 역사에서 성상파괴운동이 있었고 우상숭배를 했다는 죄목으로 신자를 처형했던 기록은 우상숭배에 대한 종교인들의 우려를 잘 드러낸다.  

  대승불교의 발전 시기는 불경의 간행과 함께 불상의 제작과 조응했다. 알렉산더 대왕과 함께 인도로 간 그리스인 중 일부가 불자가 되면서 그들은 그리스 신상(神像)과 유사하게 초기 불상을 만들었다. 후에 간다라 미술로 불리는 초기 불상들은 마치 불교의 발상지가 인도가 아닌 그리스로 착각할 정도로 그리스답다. 이후 부처님의 외형은 불교가 전파된 지역, 시대에 따라서 더욱 다채로워지지만, 발상지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는 한국의 불상에는 의외로 우리의 생김새와는 거리가 먼 발상지에서 유행한 곱슬머리 스타일이 남아 있기도 하다.       

  불교 강의를 하는 스님들은 한결같이 초기 불상이 그리스 미술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태연히 말한다. 다른 종교였다면 해당 종교의 정통성을 건드리는 불편한 부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불상의 지리적, 시대적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거침없이 소개한다. 다른 종교들에서 각 신의 형상에 변치 않는 태고의 ‘원형’을 가정하면서 지리적, 시대적 변화를 투영하지 않으려는 경향과는 대조된다.

  세상은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제법무상, 나 자신도 일 분 전의 나와 일 분 후의 내가 다르다는 제법무아를 강조하는 불교의 이치에서 우상숭배 논쟁은 무의미해진다. 신이 깃들지 않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불상들이 불토(佛土)를 확장하는 ‘역설’은 역설이 아닌 자연스러운 것이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불교의 무신론에 가까운 유신론적 특성의 일면이다.               

  불교에 익숙한 독자들 앞에서 새삼 불상 이야기를 꺼낸 것은 내 연구분야 중 하나인 “인간 너머의 지리학(more-than-human geography)”을 소개하기 위해서이다. 인간 너머의 지리학은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부터 시작된다. 서구화,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라는 역사적 국면들을 거치면서 식물, 동물과 같은 비인간(nonhuman)과 자연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자원으로 이용되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전지구적 재난, 기후변화, 환경오염의 심화는 그러한 인간중심주의에 경종을 울린다.            

  인간 너머의 지리학에서 ‘인간 너머’는 어떠한 초월적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인간 너머의 지리학은 인간의 계획, 뜻대로 움직일 줄 알았던 비인간들이 그들 나름의 의지, 행동을 통하여 인간의 예측 범위, 합리성을 벗어나는 행위성(agency)의 발현과 그러한 비인간의 행위성이 어떻게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지를 예민하게 주목하는 데 방점을 둔다.       

  구체적 예시로 동국대의 일상세계로 가보자. 동대입구역 2번 출구 인근 작은 녹지공간에 터줏대감처럼 지키고 있는 고양이들과 이들을 보살피는 캣맘이 만들어내는 관계망이 있다. 고양이들이 먹을 수 없는 인간의 음식들로 가득 찬 주변 식당가에서 안전한 음식을 제공하는 캣맘의 존재는 고양이들의 생존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언뜻 인간 캣맘이 비인간 고양이 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 캣맘이 ‘캣맘’이 될 수 있는 것은 고양이가 갖는 귀여움과 같은 “비인간 카리스마(nonhuman charisma)”가 발현되어 인간들을 끌어오기 때문에 가능했다. 시민들에게 쾌적함을 제공할 목적으로 녹지공간을 만들었지만, 예상치 못한 인간-비인간의 마주침으로 인하여 이곳은 인간 너머의 장소로서 그 성질이 변화하였다.   

  이처럼 인간과 비인간(식물, 동물, 사물, 물질 등)과의 관계를 민감하게 바라보는 인간 너머의 지리학은 인간-로봇 관계로도 향한다. 앞서 인간 너머의 지리학이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했다고 언급했듯이, 비인간으로의 시야 확장은 동시에 인간 자체에 대한 내면적 물음을 끊임없이 되묻는다. 

  2010년대 초반 한 한국 영화에서는 인공지능 로봇이 불교에 입문하여 깨달음을 얻고 열반에 드는 장면이 나온다.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의 <TV 부처> 연작은 과학-예술-종교의 새로운 관계 형성 가능성을 선구적으로 제기했다. 그런데 내 관심사는 로봇의 수행과 깨달음의 가능성보다는 낮은 기술 수준에서도 작동하는 부처 로봇 앞에서 인간 불자가 108배를 할 수 있는가이다. 실제 해외의 최신 인공지능 및 로봇 연구에서는 종교 영역과의 융복합적 시도가 증가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예수 로봇이나 알라 로봇은 드물고 부처 로봇에 관한 연구가 압도적이다. 대중문화와 과학계에서 다른 신이 아닌 부처를 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의 끊임없는 변화와 상호의존성을 강조한 제법무아와 제법무상, 무신론에 가까운 유신론으로서의 불교 특유의 종교관과 세계관은 우리에게 다양한 영감을 제공한다. 그리스 스타일이든 곱슬머리 스타일이든 여러 스타일의 부처님을 받아들인 불자라면 앞으로 부처 로봇으로부터 설법을 듣고 그 앞에서 108배를 하는 것이 별다른 고민이 안 될 것이다.    

  나의 궁극적 관심은 부처 로봇에게 108배를 할 수 있는 불자들이 어떻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보다 생태적이고 지속 가능하고 평화로운 성질로 바꿀 수 있는가다. 부처님 말씀처럼 영원함(열반)에 대한 추구가 자칫 사변적으로 흘러가면 “삶 속에서” 진리를 깨닫는 것을 놓칠 수 있다. “부처 로봇에게 108배를 할 수 있는가” 화두는 종교적으로뿐만 아니라 이번 삶 속에서 인간 너머의 지리학에 대한 고민, 실천까지 건드린다. 이 미완의 화두를 좀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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