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 우울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겨울이면 계절성 우울증을 앓는 나는 여름인 나라에 와 있었고 글쓰는 삶을 계속할 수 있는 대학원 입학이 예정돼 있었다. 이국(異國)은 거의 빠짐없이 맑은 날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속으로 맴도는 한마디는 이것이었다.

그만하고 싶다.

그만하고 싶은 대상은 당연하게도 사는 것, 그 자체였다. 문제는 그 이유를 전혀 짐작할 수 없다는 것에 있었다. 원인 모를 고통의 여진에 어리둥절해하며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고민한다고 해도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나에게 주어진 하루와 낯선 장소의 관찰을 그만두지 않는 것, 내 감정을 과잉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 밤의 불면이 길어지지않도록 낮에 육체의 힘을 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여행의 낭만으로 그 답을 낯선곳에서 찾았노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는 그곳에서 소진의 이유를 찾지 못했다. 다만 그곳을 떠나기 하루 전날 5km 달리기를 성공했을 뿐이었다.

돌아와서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학기가 시작되었고 글을 썼다. 원래 하던 대로 내가 써낸 것들에 결점과 결함을 찾아냈다. 원고에 깨알만 한글씨로 “짜임새 미흡”과 같은 메모가 늘어났고점점 더 지쳐갔다. 어느 날은 한 글자도 쓸 수가 없었다. 움직이는 커서만 보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면 밤에 잠을 이루기가 힘들었다. 그러다가 아른거리는 밤의 정경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여름만 있는 나라에서 5km를 달려대던 그날의 밤이었다.

온몸의 근육이 피로를 말하면서도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 희한하게도 강렬한 확신이 있었다. 내 육체가 계속해서 움직일 수 있다는 추상적인 확신이었다. 돌이켜보면 멈추지 않음의 상태, 그 깊숙한 곳에는 자기 긍정이 있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지는 육체가 진심으로 좋았다. 5km의 경과를 알리는 안내음을 들었을 때, 깨달았다. 달리는 것, 그 자체를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았다면, 내 육체가 이 정도 부하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와 애정이 없었다면, 나는 뛰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그동안 나는 자신의 결점을 찾고 그 결점을 메워가는 방식이야말로 최고의 성장 방식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한국의 교육은 개인의 결점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대표적인 예로 5지선다로 구성된 수능, 객관식으로 구성된 전문직종 시험 등이 그렇다. 이 모든 시험은 개인에게 취약한 것을 확인하게 하고 그것을 개선하는 방식으로 트레이닝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스스로를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틀리지 않도록 감시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으로 보게 된다. 즉, 자아를 스스로에게서 유리하게 되는것이다. 문제는 이런 자기 분열적 성장을 독려하는 콘텐츠를 끊임없이 재생산해 내는 환경에 있다. 미라클 모닝, 짠테크, 부린이와 같은 키워드가 저성장 시대에 당연하게 등장하는 키워드라고 단순히 넘어가기엔 찝찝한 구석이 있다. 그들은 개인이 처해 있는 현실의 부족함을 계속해서 환기한다. 그 대상은 지극히 개인적인 라이프스타일이기도 하고 경제적 측면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하루 내내 꼬박 노동에 시달리고 집에 돌아왔으면서도 죄책감에 시달린다. 당연한 휴식을 태만으로 이름 붙이면서 말이다. 이런 악순환은 자신의 존재에게 미움을 심고 결국 소진의 상태를 경험하게 한다.

지나친 선생님의 말 한 토막이 떠올랐다. 행복하게 쓰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결점을 현미경으로 바라보듯 했던 기존의 성장 방식은 분명 빠르게 목표에 도달하게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방식으로 결코 행복해질 수 없었다. 인간에게 육체성은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육체의 감각을 확장하는 일이 아닐까. 건강한 정신을 움직이게 하는 것. 나는 그것을 위해 용기를 내기로 결심했다.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을 용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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