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두 개의 본업이 있다. 휘민이라는 필명으로 살아가는 작가로서의 본업과 박옥순이라는 본명으로 마주하는 강사로서의 본업. 어느새 시인으로 22년, 강사로 12년을 살아왔다. 하지만 모두 잘 해내고 싶은 욕심과 달리 창작과 강의, 그리고 연구를 병행하는 일이 점점 버거워진다. 시에서 논문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우뇌형 인간은 가끔 이런 자조 섞인 질문을 자신에게 던진다. 작품은 일 년에 십수 편을 발표하지만 논문은 한 편 쓰기도 바쁘다. 시집이 나 동화집을 출간하는 해에는 건너뛰기도 한다. 그렇다고 연구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몇 해 전부터 나는 장애인문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논문도 몇 편 썼다. 그 계기가 되어준 것은 2019년 10월 12일에 열린 장애와문학학회(회장 윤재웅) 창립 세미나였다. 그때 장애인동화연구로 발표를 했는데, 그 인연으로 지금은 장애인동화 비평도 하고 있다. 그런데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 이전까지 나에게 장애인문학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이데거는 대상에 대한 이해의완성을 해석이라고 했는데, 그때까지 나에게 장애인문학은 해석은 고사하고 인식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장애는 더 이상 장애인이 라는 소수자들만 겪는 특수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인구의 5%인 260만 명, 전 세계 인구의 15%인 10억 명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뇌성마비 작가 어맨다 레덕은 『휠체어를 탄 소녀를 위한 동화는 없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장애와 비장애는 전체 인류가 만드는 거대한 변이 스펙트럼의 두 점일 뿐”이며,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어떤 형태나 모양으로든 이 스펙트럼 위에 머문다는 뜻”이라고. 비장애인은 종종 장애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거나 장애인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인식한다. 나 또한 그랬다. 하지만 이 또한 편견이다. 어맨다 레덕이 예리하게 통찰해냈듯이 우리는 ‘장애/비장애’라는 거대한 변이 스펙트럼 중 단지 하나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니까. 만약 지금 비장애 상태라면 당신의 운에 고마워해야 한다. 우리가 장애라는 변이 스펙트럼 위에 머물 가능성은 언제든 열려있으니.

여기서 한 가지 짚어볼 것은 장애인문학의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장애인문학은 두 가지 개념으로 통용된다. 협의의 개념으로는 장애인이 창작의 주체가 되는 작품을 의미하고, 광의의 개념으로는 장애인 문제를 소재나 주제로 다루고 있거나 장애인이 등장하는 작품을 일컫는다. 둘 중에 나는 전자에 관심이 있다. 후자의 경우 장애가 작품에 극적인 긴장감과 미학적 불안감을 불어넣는 서사적 장치로 활용될 때가 많지만, 전자는 보다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장애인 주체에 의해 창작된 문학은 신체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낙인을 극복하기 위한 저항문학이자, 장애 체험의 현실적 재현을 추구하는 증언문학으로서 가치가 높다. 장애인문학이 지닌 이러한 정체성은 장애인문학을 넘어 보편의 문학이 깊이 있게 다루어야 할 가능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에서 장애인문학은 여전히 소수자 문학의 지위에 머물러 있다. 창작뿐만 아니라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다. 학문의 체계 속에서 장애인문학은 특정 범주를 적용할 수 없는, 그래서 예외적이고도 부가적인 ‘기타문학’으로 분류되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장애인문학은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선입견으로 인해 오랫동안 연구자들로부터 외면받아왔다. 장애인식의 한계로 인해 연구의 진입 장벽이 의도치 않게 높아진 셈이다.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지난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성공으로 한국 드라마의 위상이 높아지는 동안, 과연 우리의 장애인식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장애인의 날’에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와 피켓을 들지 않아도 되는 날은 과연 언제쯤일까? 배리어 프리(barrierfree)를 주장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인식의 장벽이 존재한다. 그러나 장애인이라는 소수적 주체들과 그들의 문학 행위를 제대로 평가할 때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사회 통합과 다양성의 가치는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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