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로이 앤더슨의 영화는 통상적으로 말하는 영화 ‘보기’에 관해, 정확히는 ‘본다’라는 용어에 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흔히 ‘영화를 본다’고 이야기 할 때 사용하는 ‘본다’라는 용어는 얼마간의 해석적 행위와 의미화 작업을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해 ‘영화를 본다’라는 말은 표층적으로 드러난 장면 아래에 깔려있는 암시적인 의미들, 영화가 어느 정도 요구하는 코드를 따라 장면 장면을 감상해 나가는 해석 층위의 ‘보기’를 요구하는 측면이 있다. 이때의 보기가 감상에 가깝다면 <2층에서 들려오는 노래>의 보기는 감상보다는 관찰에 가깝다. 우리는 지극히 통제적이고 인공적으로 구성된 사각의 프레임 안에서 펼쳐지는 이미지들의 나열을 관찰한다. 이때 관객은 명확한 주제 의식 아래 전시되고 있는 이미지들을 바라보는 한 명의 관찰자로서 영화 바깥에 서 있다.

이 회화적 프레임 안에서 보는 이의 시선이 가닿는 곳은 사물들의 작은 흔들림, 인 물들의 미세한 몸짓, 즉, 정적인 공간과 대비되는 동적인 행위들이다. 영화가 진행되 는 내내 카메라는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카메라는 칼레가 열 차 바깥에서 죽은 친구 스벤을 만날 때 단 한 번 칼레를 따라 오른쪽으로 움직인다). 영화는 오직 고정된 시선 안에 담기는 이미지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이미지의 나열 속에서 우리의 시선을 붙잡아 두는 것은 걷고, 앉고, 눕고, 일어서고, 다가오고, 고 개를 조금 돌리고, 문을 통해 들어오거나 나가는 등의 일상적인(그러나 비일상적인 것으로 보이는) 몸짓을 ‘수행’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영화의 초반부, 알란 스벤손을 찾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리 고, 그는 문의 안쪽에서 사진 촬영을 하는 듯 보이는 이들에게 이곳에 알란 스벤손이 라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들 중 하나가 여기에 그런 사람은 없다고 답하자 대 화는 종료된다. 그러나 계속해서 문이 열려 있자 그들 중 한 사람이 다시 말한다. 문 을 닫으라고. 문 쪽을 가리키며 지시한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몹시도 당연한 어떤 움 직임에 집중하게 되는데, 그것은 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리고, 문을 닫으라고 지시하자 문이 닫힌다는 사실이다. 이 당연한 움직임은 너무도 일상적이고 당연해서 화면을 통과하여 우리에게 보여지는 순간 낯선 움직임으로 환치되고 만다. <2층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이처럼 일상적인 움직임을 의식적으로 펼쳐 보여주며 관객의 시선을 장면 안에서 ‘수행’되고 있는 몸짓에 가닿게 한다.

중요한 것은 움직임이다. 이어지는 장면은 또 어떤가. 아까 그 남자는 찾고자 했던 사람을 찾지 못하고 거리를 지나가던 이들에게 이유 없이 폭행당한 뒤 쓰러진다. 남자의 비명과 함께 피가 흘러내린다. 무채색의 톤으로 이루어진 장면 속에서 가로로 길게 흐르는 붉은색 피. 영화를 보는 이의 시선은 그 피를 따라가게 되어있다. 영화 외부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있는 우리와 함께 영화 내부에서 쓰러진 남자의 건너편에 서 있는 사람들의 시선 또한 남자에게 머물러 있다. 건너편에 서 있는 그들의 시선은 남자의 등장 이전부터 ‘움직이는 것’에 머물러 있는데, 움직이는 것을 향하는 그 시선이 바로 영화를 보는 우리의 시선과 다름없다. 이 움직이는 이미지는 어떤 해석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흘러가는 피는 흘러가는 피로서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현대사회의 폭력성. 자본주의 구조의 부조리. 갈 곳 없이 내몰린 채 삶과 죽음의 경 계 사이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는 인간. 이 명확한 주제 의식을 감독은 숨겨두지 않는 다. 애써 감추지도 않는다. 보여준다. 영화는 시종일관 어둡다. 톤 다운된 배경에서는 색채감을 찾아보기 어려우며 하얗게 분칠되어있는 배우들의 얼굴에는 표정이 거의 없다. 도시는 죽어버렸고 도시를 배회하는 인물들은 모두 시체 같다. 인물과 인물 사이 관계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볍고 (어떤 ‘관계성’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해야 할까?) 영화를 이루는 장면 장면은 그 이어 붙임의 과정에 의해 분절된 감각을 지닌다. 인물 간의 정서적 교류와 소통을 소거해 버린 현대사회의 폭력적 면면이 영화의 구성적인 틀과 닮아있다. 로이 앤더슨이 극도로 인공적인 환경을 조성하여 보는 이를 ‘움직임’ 자체에 집중하게 만들면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결국 이것이 아닐까? 인간 이 감상자가 아닌 관찰자로서만 존재하는 사회. 움직임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적 맥락과 의미는 소거된 사회. 영화에는 시에 미쳐버린 나머지 정신병원에 입원한 인물이 등장한다. 어떤 사건이나 장면을 내면화하여 언어로 표출하는 예술로서의 시를 떠올렸을 때, 내면이 아닌 표층에서 추동된 듯한 영화 속 움직임들은 마치 무언가를 내면화하여 받아들이는 일련의 과정 자체를 거부하게 하는 현대성에 대한 은유 같다.

그런데 방금의 서술은 의미화 작업을 통과하는 ‘감상’으로서의 영화 ‘보기’가 아닌가? 아무래도 <2층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더 재미있게 보는 쪽은 ‘관찰자’로 남아 있기를 선택한 쪽 같다. 몸짓을 몸짓으로 받아들이기. 그런 점에서 다음의 짧은 대화가 기억 속에 오래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길 건너편의 집이 움직입니다.” “움직인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움직인다니까요!” 회의 중이던 남자가 창 너머에서 ‘말 그대로’ 움직이고 있는 집을 가리키며(창 너머는 관객에게 보이지 않지만) 외치는 말이다. 이 말이 회의실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을 일어서게 한다. 창문 쪽으로 다가가게 한다. “움직인다니까요!” 어떠한 비유도 없이 물리적 움직임 그대로를 지시하는 이 대사가 내게는 인상 깊다.

△ 사진 = 다음 영화
△ 사진 = 다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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