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일,『만약 우리의 시 속에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 문학과지성, 2022.

 
 
  △ 사진 : YES24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멈춰 세웠던 일이 한없이 낯설고 기이하게만 여겨졌던 것처럼, 느닷없이 찾아온 일상으로의 회복 역시 어딘가 어색하고 잘 믿어지지 않는다. 다행이라 여기고 반겨야 함이 마땅하겠으나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영 기쁘게만 다가오진 않는다. 그토록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숱한 어둠과 죽음의 기억들조차 머지않아 곧 잊어버리게 될 거라는 걸, 심지어 재빨리 지워내고 싶어 하리라는 걸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에 새겨진 이 생존에의 명령은 가혹하다. 그러나 그 가혹함 덕분에 우리는 번번이 살아남는다. 기어코 살아남아 입에 담을 수 없는 수치의 증인이 된다.

   올해 3월에 발간된 김중일의 여섯 번째 시집『만약 우리의 시 속에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은 이 가혹한 생존 기계로서의 몸에 대한 뜨거운 부정이다. “몸은 이기적인 유전자를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는 건 성긴 학설”일 뿐이며 “정확히 몸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눈물’을 담는 그릇”(「좋은 날을 훔치다―‘시’라는 식당」)이라 역설하는 시인은, 부재하는 이가 남기고 간 온기와 수수께끼 같은 질문들을 속절없이 담아내야만 하는 애도의 공간으로 몸을 규정짓는다. 이는 어떤 형태의 증명도 거부하는 절대적인 선언이지만 그래서 유독 더 아프고 쓰리다. 저 뜨겁고 단단한 선언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한 “죽어서 차갑게 체온을 끌고 내려갈 몸”(「햇살」)을 천형처럼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김중일의 시는 부재하는 타자의 숨을 나누어 마시는, 자아의 경계마저 무너뜨리고 뒤섞는 매혹적이고도 아름다운 애도의 순간들을 직조해내지만, 냉혹하고 무심한 몸속에서 언제고 다시 깨어나야만 하는 필연에 대해 눈감지 않는다. 애도의 불가능성과 불가피함이 살아남은 자의 부정할 수 없는 필연이라면, 그럼에도 생존을 위한 몸의 시간을 처연히 살아내야 한다는 것은 애도하는 자가 마주하고 이겨내야 하는 또 다른 필연일 것이다. 이 이중의 필연을 시인은 몸 없는 살갗의 시간(“오직 기억의 성분으로만 이루어져 있잖아, 햇살이라는 살갗은.”, 「햇살」)으로 견뎌내려 한다. 차갑게 식어 내리는 몸의 필연을 온전히 응시하면서도, 몸 바깥의 몸, 몸 없는 살갗의 시간을 믿으며 부재하는 이의 눈길과 온기가 머물렀던 흔적을 마음을 다해 만지고 발굴하며 기억해내려 한다.

   잠시라도 눈을 감으면 무서운 속도로 자라나는 마음의 굳은살을 아프게 뜯어내고 그 상처가 아물기까지의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아무리 빨아도 결코 다 빠지지 않는 슬픔의 때”(「가장 큰 직업으로서의 시인―아무도 접속하지 않은 채널의 접속을 기다리며 하는 상념」)를, 캄캄한 부재 속의 짙은 어둠을 여린 살갗으로 섬세히 만져볼 것을 요청한다. 그럴 때 삶과 죽음은, 존재와 부재는 서로의 날카로운 경계를 잃고 무너질 듯 뒤섞이며 끓어오른다. “해변의 모래는 죽은 이들이 미처 못 한 말들이 해와 달빛에 그을려 부스러진 잔해들”(「만약 우리의 시 속에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시’라는 침실」)이라 믿는 시인에게 부재는 수억의 존재가 가장 충일된 언어로 스스로를 알리는 행위이며, 그 눈부신 암호 속에서 우리는 부재의 언어에 존재의 언어가 거꾸로 삼켜져 버리는 역동적 침묵의 순간에 동참하게 된다.

   김중일의 시가 펼쳐 보인 이 중단될 수 없는 사랑의 노동 속에서 하나의 세상이 무너지고 다시 일어선다. 영원히 종결될 수 없는 애도의 섭생이 그렇게 꼭 맞아떨어지는 온전한 몸과 호흡을 얻는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