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 혁명의 민들레 홀씨

 
 
  △ 사진출처 : Pixabay  

   지난 10월 25일 칠레에서 진행된 국민투표에서 77.6%의 국민이 새 헌법 제정에 찬성했다. 이제 칠레는 새로운 역사를 쓰는 과정에 들어가게 됐다. 일부 언론에서 ‘개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잘못된 단어 선택이다. 헌법을 개정하는 ‘개헌’과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제헌’은 근본적으로 다른 정치 과정이다. 개헌은 기존의 헌법 중에서 일부만 수정하지만, 제헌은 기존 헌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법체계를 수립한다. 이러한 차이는 문자적 의미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제헌 과정에서 기존 헌법은 폐기되는데, 그 결과 기존 헌법 조항에 존립 기반을 둔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가 공중분해 된다. 검사, 판사, 국회의원, 대통령 등의 모든 권력자는 일거에 공직에서 물러난다. 그들을 그 자리에 있게 한 기존 헌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썩을 대로 썩은 기득권을 한꺼번에 청산할 수 있다.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은 대략 이러할 것이다. 우선 선거를 통해 새로운 헌법을 제정할 권한을 위임받은 제헌의회 의원을 선출한다. 선출된 제헌의회 의원들이 새 헌법의 내용을 논의하고 다듬어 내놓으면 국민투표를 통해 주권자인 국민이 헌법을 승인한다. 새로운 헌법이 발효되면 그에 근거해서 새로이 국가기구를 구성한다. 대통령 선거도 새로 치르고 국회의원도 새로 뽑고, 검사와 판사도 새 헌법에 근거해서 완전히 새로 구성한다.

   국가가 꼭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의 형태를 띠어야 할 이유도 없다. 새로운 헌법을 만드는 것이니, 상상력을 동원해 민중의 정치 참여를 더욱 촉진하는 진일보한 국가를 설계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국가기구는 완전히 새로운 세력에 의해 물갈이될 수 있다. 그야말로 ‘혁명’, 그 자체다.

   나는 우고 차베스가 이끄는 베네수엘라의 혁명 과정을 연구해 2006년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라는 책을 출간했다. 내가 베네수엘라의 혁명에 관심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가 바로 ‘제헌의회’다. 차베스는 대선 공약으로 제헌의회 소집을 내걸고 1998년에 대통령에 당선돼 기존 헌법을 폐기하고 새로운 헌법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베네수엘라의 석유를 사유화하고 갖가지 횡포를 부린 부패한 친미 기득권 세력들을 일소하고, 21세기 사회주의의 기치를 내세워 무상교육·무상의료 등의 다양한 복지 정책을 실시했다.

   여전히 베네수엘라는 미국의 고립압살 정책과 국내 기득권의 저항 때문에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의 민중들은 차베스의 유지를 이어받은 마두로 정부를 중심으로 단결해 미 제국주의와 국내 기득권에 맞서 투쟁 중이다.

   우고 차베스가 중남미에 처음으로 씨앗을 뿌린 ‘제헌의회’ 전술이 볼리비아, 에콰도르 등을 거쳐 칠레에서도 꽃을 피우고 있다. 칠레의 이번 새 헌법 제정 국민투표가 우고 차베스 그리고 베네수엘라의 혁명과 맞닿아 있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 제국주의가 차베스와 베네수엘라 그리고 지금의 마두로 정부를 무너뜨리려는 이유다. 힘껏 억누르지 않으면 혁명의 불꽃이 중남미 구석구석으로, 더 나아가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갈 테니. 그리고 미국의 바람과는 달리 혁명은 거센 바람에도 굴하지 않는 민들레 홀씨처럼 시나브로 퍼져나가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노동자가 연이어 과로로 사망하고 있으며,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실의에 빠져있고, 집값은 투기 세력의 장난질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극심한 양극화로 사회는 병들어 가는데 거대 보수 양당은 권력욕에만 취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로남불로 일관하고 있다. 몇 년마다 시행되는 선거는 진작 덜 나쁜 놈을 뽑는 아사리판이 된 지 오래이며, 대다수 국민은 정치혐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느끼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중남미에서 연이어 벌어지고 있는 ‘제헌의회’ 소집에 주목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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