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이후의 광장

 
 
  △ 대통령 탄핵 이후에도 여전히 광화문에 모이는 사람들. 광장은 이제 사회·정치적으로 중요한 기표가 되었다. (사진 : 김세연)  

   박근혜가 탄핵당하고 세월호가 인양되었다.   이 문장을 쓸 수 있는 날이 왔다. 희망을 적은 것도 아니며 가설을 쓴 것도 아니다. 그동안 그 긴 시간을 개발사업 하나 막겠다고, 정책 하나 고치겠다고, 법 하나 바꾸겠다고, 진상 하나 규명하겠다고 매달려도 꿈쩍 않는 듯했다. 이 시대는 그 우울한 반복의 지속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결에 이 문장을 사실명제로서 쓸 수 있는 시간이 왔다. 박근혜가 탄핵당하고 세월호가 인양되었다.   그런데, 그 다음으로 써야 할 문장은 무엇인가. 현재로선 “○○○가 대통령이 되었다”가 먼저 떠오른다. 이제 대선이다. 아마도 이번 대선의 결과는 (적어도 지난번만큼)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박근혜는 지난 대선기간 동안 내놓은 공약들 대부분을 저버렸으나 국민통합의 약속만은 역설적인 형태로 상당히 실현했다. 이번 대선에서는 정권교체가 이뤄질 것이다. 그리고 박근혜 자신이 재임기간 동안 자주 운운했던 ‘비정상의 정상화’가 진행될 것이다.   그런데 그걸로 충분한가. 이번 광장에서 “박근혜 탄핵” 이전에 나온 말은 “이게 나라냐”였다. “이게 나라냐”라는 영탄이자 물음은 정권교체에 만족할 수 있는가. 첫 문장에서 박근혜의 탄핵 말고 후반부를 보자. 이제야 세월호가 인양되었다. 희생의 정체가 드러날 시간이 다가왔다. 그 시간은 무엇을 향할 것인가. 그 시간 동안 어떤 문장이 사회적·역사적으로 쓰여질 것인가.   이번 광장은 현직 대통령을 끌어내리면서도 연행자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부상자도 거의 없었다. 많은 사람의 여러 헌신이 있었으나 희생은 거의 없었다. 다행스런 일이다. 희생은 피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희생 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그전의 압도적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의 평화집회는 그전의 희생들 위에서 가능했다. 세월호 희생자가 있었고, 세월호 이후에 가습기 희생자가 있었고, 세월호 이전에 대구지하철참사, 씨랜드참사, 삼풍백화점참사가 있었다. 그리고 세월호와의 사이에 백남기 농민이 있었다. 사람마다 연상은 달라지겠지만, 세월호는 다른 희생들을 환기하는 사건들의 사건으로서 분명 이번 광장의 기압을 이루었다. 이번 광장이 희생 없이도 국가적 희극 앞에서도 무거울 수 있었던 것은 지난 희생들에 빚지고 있는 까닭이다. 그 희생들을 탕진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보다 많은 것이 변제되어야 할 시간이다.   “이게 나라냐.” 대통령을 탄핵시킨 이 외침은 대통령과 비선실세에 의한 헌정파괴이자 국정농단만을 따진 것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이 물음은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압사된 두 명의 여중생을 추도하며 촛불집회가 등장한 이래 촛불과 늘 함께해 왔다. “이게 나랴냐”는 그때마다 당시 정권에 대한 호소이자 기성의 정치체제 자체에 대한 반문이었다. 미약한 촛불은 총체적 물음과 함께 시작되었다.한국 사회에서 20년 동안 대의민주제는 공고해졌지만 정작 자신의 주장을 대변할 창구가 없는 대중들은 늘어나고 있다. 대의제가 듣지 못하는 목소리들이 늘어나고 있다. 전체를 위해 희생되는 일부(결국 전체에 속하지 못하는 일부), 합의에 의해 배제된 자들(결국 합의 상대가 아닌 자들), 국민을 호명하며 희생시키는 자들(결국 국민국가 안에 있는 내부 피식민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지금의 대의민주제 아래서 그 일부는 이제 셀 수 없을 만큼 많아졌고, 그들이 대중의 형상이 되고 있다. 그 대중들은 그간 촛불을 들고 여러 차례 여러 장면에서 “이게 나라냐”고 외쳤다. 그리고 지금, 대통령을 끌어내렸다.   다만 그 십오 년 동안 “이게 나라냐”는 물음으로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채 짧은 영탄에서 멈춰서곤 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만약 지금이 이전과 진정 다른 시간이려면 이 물음은 더욱 정교해져야 한다. ‘국가란 무엇인가’로 심화되고 ‘어떤 사회인가/여야 하는가’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지금은 그 물음을 길러나가야 할 때이며, 대선도 그 쓰임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건대 이번 대선의 결과는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선의 과정 자체가 얼마간 유해할지도 모른다. 민주주의, 즉 데모스의 힘이 갖는 다양한 의미를 다시 한 번 축소하고 민주주의를 다시금 숫자에 의한 결정으로 환원하고 말지 모른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좋은 목자를 고르는 게 아니라 양떼로 전락하지 않는 일이다.   다시 묻는다. “○○○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 다음 써내야 할 문장은 무엇인가.   지금, 우리에게는 대선보다 더 큰 선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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