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연기법에 따르면 모든 것이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이런 사유 방법을, 어떤 조건에도 변치 않는 실체를 상정하는 초월성과 대비하여 내재성의 사유라 한다. 모든 것이 조건에 내재적이란 말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옳다, 선하다, 아름답다는 판단이 조건을 떠난 분별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니 불교에는 미학이란 불가능해 보인다. 미학이란 미추를 분별하고 그 이유나 근거를 밝히는 것이니까. 그래서인지 불교는 대단히 정교하게 발전된 철학은 있지만 그 긴 역사 속에서 미학은 따로 존재한 적이 없다. 정말 불교미학이란 불가능한 것일까?

 

 불교미학은 없지만, 석굴에서 사찰, 스투파와 정원, 불상, 그림, 음악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엄청난 양의 예술작품이 있다. 예술작품은 아름다움이라는 미감에 따라 만들어진다. 그러니 예술작품마다 미감이 스며들어 있다 해야 한다. 조건마다 달라지는 상이한 미감들이 거기 있는 것이다. 미학이란 미감의 해명이고 미감의 작용에 대한 이론이다. 따라서 패턴화된 미감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미학이 있다고 해야 한다. 해명되지 않은 채 작품 속에 깃들어 있다. 그것은 작품이 만들어질 때 이미 작용했을 것이다. 작품을 만드는 이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방식으로 실존했을 것이다. ‘미학이라 명명된 이론은 따로 없었지만 미학은 작품들로 구체화된 미감 속에 말없이 실존해왔다. 그렇다면 불교미학이란 작품 속에 숨어 침묵하고 있는 이 말없는 미감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것이 될 터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작품들로 하여금 미감과 미학을 말하게 할 것인가? 내재성의 미학은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미적 기준을 그때마다 추적해야 하기에 어디로 가야할지가 명확하지 않다. 아주 다른 미적 기준과 미감의 양상들, 선호하는 형상들을 모두 포괄해야 할 테니 여러 방향으로 발산하는 다양성을 가질 것이다. 그래도 그것이 불교미학이라 한다면,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어떤 일관성은 있어야 한다.

 

 가장 쉽게 등장하는 것은 불교 철학의 개념을 통해 통일성을 얻으려는 발상이다. 불교의 예술작품이니 불교의 개념을 사용해 해명하면 된다는 것은 차라리 자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이나 신성, 이성, 인간성 같은 개념이 서양의 예술작품을 해명하는 미학적 개념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미감을 종교적 관념에 두들겨 맞추게 되거나 철학적 개념으로 정당화하는 것으로 미학을 오도한다. 자비, 해탈, 원융, 법공, 정토 같은 개념을 미학에 직접 끌어들이는 것도 이와 유사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물론 불교 예술이 불교의 가르침과 무관할 리 없다. 문제는 종교적 교의나 철학적 개념이 예술작품이 되는 것은 교의가 감각화되고 개념이 미감화되는 매개고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가령 신성은 신이나 성자를 그린다고 미적인 것이 되는 게 아니라 숭고라는 경험을 산출하는 감각적 형상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 이때 신성과 숭고는 상관적이지만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종교적 교의나 철학적 개념은 그 자체로는 사유의 영역에서 작동하지만, 예술작품은 감각의 영역에서 작동한다. ‘신성이란 개념은 신정하지 않고 웃음이란 개념은 웃기지 않는다. 미학은 개념과 감각 사이에서, 개념이 감각화되는 지점을 찾는 작업이다. 그림이나 조각이 웃음을 주는 것은 어떤 형상적 특징을 통해서인지, 적멸의 고요함이 느껴지는 것은 어떤 형상적 특징에 기인하는 것인지 등을 찾고 해명하는 것이다.

 

 교의나 개념과 감각이 연결되는 이런 미학적 연결고리들이 드러날 때, 교의나 개념은 예술작품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 된다. 이는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다양한 미감들에 불교미학이라 명명할 일관성을 부여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예컨대 연기적 사유가 다가오는 조건을 긍정하라는 가르침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지역마다 다른 생각이나 감각이 섞이며 새로운 감각적 형상을 만드는 미감을 통해 불교미학의 한 단면을 보여줄 수 있다. ‘무심이나 무원(無願)’ 같은 개념은 감정이나 느낌을 잘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은밀하고 은미하게 표현하는 미감을 통해 불교미학의 또 하나의 단면을 드러내줄 수 있다. 이처럼 절단면에 따라 달라지는 수많은 미학적 단면들의 연속체를, 아직 시도되지 않은 또 다른 절단에 열려 있는 이 연속체를 불교미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비판적이라 하는 게 더 적절할 또 하나의 방법이 필요하다. 서구에서 수립된 초월성의 미학과 대조되는 지점들을 통해 불교적 미감을 미학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불교미학이 없었음에도 불교예술에 대해 해명해야 했다는 그간의 사정으로 인해, 서구의 미학적 개념을 불교미술작품에 그대로 적용해왔다는 사실 때문에 필수적인 것이다. 가령 초월성과 짝한 숭고의 개념을 불상이나 불화의 미감을 설명하는데 동일하게 사용될 때, 불교에 핵심적인 내재성의 사유와 감각은 서구의 초월적 사유와 감각에 포섭되고 만다. 가장 극단적이고 조악한 것은 불교 전각의 기둥들에서 보이는 배흘림을 그리스 신전 기둥의 엔타시스 양식에 두들겨 맞추는 것이다. 초월성의 미학과 대조하며 비판적 경계를 그리는 방식으로 불교적 미감을 추적하게 될 때, 내재성의 미학이라 명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경계선이 그려진다. 이로써 초월성의 서구와 대비하여 내재성의 동양이란 말이 불교미술의 일관성을 명명하게 될 것이다. 이는 인간이나 문명이란 이름으로 보편성의 지위를 독점하고, 자신과 다른 문화를 미개나 야만으로 간주하여 폄하했던 서구와 대결하며, 그와 대립되는 단어인 동양이란 말을 그들의 사고와 감각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불교를 통해서 포착되는 이러한 동양은 간다라와 서역에서부터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크메르, 인도네시아를 잇고, 인도에서 티벳, 몽골, 만주를 이으며, 중국, 한국, 일본을 연결하는, 지리적인 의미에서의 동양 전체를 포괄한다. 이는 동양이란 말에서도 중국, 한국, 일본을 떠올리는 우리의 협소한 감각을 넘어 동양을 사고하는 감각을 바꿀 것을 요구한다. 불교란 그 장대한 지역 전체를 가로지르며 섞이고 연대했던 수평적 트랜스내셔널리즘의 사유와 감각이 생멸을 거듭한 사건의 장을 지칭하는 이름인 것이다. 불교미학이란 이 트랜스내셔널한 미감을 따라가는 감각의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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