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寺域)에 들어서 부처님이 계신 대웅전에 이르는 길을 떠올려 보자. 경내로 들어서는 도중 일주문, 천왕문, 해탈문과 같은 여러 개의 문을 지나칠 것이다. 그 중 천왕문을 지날때는 험악한 인상을 자랑하는 거대한 조각 네 구를 만나게 되는데, 잔뜩 치켜올린 숯검댕이 눈썹 아래 부릅뜬 눈, 용 비늘 같이 탄탄한 갑옷과 무기로 무장하고 발 아래로 고통에 몸부림치는 생령(生靈)을 복속시킨 무장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들은 동서남북 사방에서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불교의 호법신 사천왕으로, 사천왕은 고대부터 탑이나 건물 등에 부조되거나 상으로 만들어져 봉안됐다.

 

 한국불교미술에서 사천왕이 등장한 가장 이른 사례는 682년 감은사 동·서 삼층석탑 사리기 외함의 사천왕 부조이다. 사리기는 부처님의 유골인 사리를 탑 안에 봉안할 때 담았던 여러 겹의 용기 세트를 말하는데, 감은사의 두 탑에 안치된 사리함 중 가장 바깥에 위치한 함의 네 면에 사천왕이 새겨져 있다. 이처럼 통일기 신라 초 사천왕의 위치는 탑 안인데 점차 시간이 흘러갈수록 탑 안에 위치했던 사천왕이 탑의 표면(초층 탑신 면석)으로, 또 사찰 입구의 천왕문으로 옮겨지는 현상이 관찰된다. 임영애는 사천왕이 점차 안에서 밖으로자리를 옮기는 변화에 주목해 천왕문의 등장: 사천왕상의 봉안위치와 역할을 작성했다.

 

 682년 감은사 사리기의 사천왕 부조 사례처럼 처음 탑 안에 봉안됐던 사천왕상은 8세기 중엽 탑신 표면으로 자리를 옮긴다. 탑신에 사천왕 부조를 새긴 가장 이른 예는 원원사지 삼층석탑으로 초층 탑신 네 면에 각 1구씩 조각했다. 탑신의 사천왕 부조는 이후 널리 유행해 9세기부터는 불탑뿐만 아니라 승탑에도 조각되며, 유행은 고려 전기까지 지속된다.

 

 탑신에 부조로 새겨져 사리를 수호하던 사천왕상은 곧 사찰 입구의 문에 서서 사역 전체를 수호하게 된다. 법당 안이나 탑의 안팎에 봉안하던 사천왕상을 사찰 입구의 독립된 공간에 거대하게 세운 것은 그 비중이 이전에 비해 분명히 커진 것을 시사한다. 통상의 연구는 남아있는 천왕문이 조선 후기 이후의 건물이기 때문에 사찰 입구에 천왕문을 만들기 시작한 시기를 임진왜란이 끝나고 사찰을 재건하는 17세기 무렵으로 추정하지만, 임영애는 고려 말 통도사에 천왕문을 세웠다는 기록과 고려에서 금강명경을 배경으로 한 사천왕 도량이 38회 가량 이뤄졌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고려시대에도 통일기 신라와 마찬가지로 사천왕의 중요성을 인식했으며 사찰 입구에 천왕문을 건립한 것은 13세기 후반부터였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임영애는 사천왕의 수호 공간이 사찰 전체로 확장된 배경으로는 고려와 원의 화친이 이뤄지고 구법승의 행렬이 활성화되면서 중국 사찰의 천왕전이 고려 사찰에 도입돼 13세기 후반 무렵 천왕문으로 정착했을 가능성을 설명한다. 중국은 9세기 무렵이면 경내에 사천왕상을 따로 봉안한 천왕각을 세우고, 11-12세기가 되면 사찰 입구에 산문의 역할을 하는 천왕전을 건립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천왕문이 정착되고 조선 후기에는 대형 사천왕상의 제작이 유행한다. 통상의 연구는 천왕문 안에 대형 사천왕상을 배치한 유행이 조선 후기 벽암 각성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벽암 각성이 의승군이 주둔하던 사찰에 천왕문과 사천왕을 세움으로써 사천왕의 기본 개념인 호국 정신을 실천하려 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영애는 1515년 보림사 사천왕상 등 벽암 각성의 등장 이전에 이미 천왕문과 대형 사천왕상의 제작이 존재했다는 것으로 미뤄보아 조선 후기 대형 사천왕상의 유행을 벽암 각성의 공으로 돌리기 어렵다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