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지난달 5일부터 29일까지,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전시 공간 SeMA 창고에서 주슬아 작가의 전시 《노멜의 추적일지》가 진행됐다.

  전시 《노멜의 추적일지》는 레몬을 구성하고 있는 ‘단서’가 사라져버린 어느 날을 기점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 레몬을 구성하고 있는 단서란 무엇일까? 당장 눈앞에 레몬 한 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내가 떠올린 레몬 한 알의 이미지는 아마도 거의 모두의 머릿속에 그려졌을 바로 ‘그’ 레몬의 형상을 하고 있다. 노랗고, 껍질 표면이 오돌토돌하며, 중간 부분이 가장 도톰하고 양 끝으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그 레몬 말이다. 모국어를 처음으로 배우는 어린아이가 학습용 낱말 카드에서 보게 될 레몬 그림과도 매우 흡사하다.

  주슬아의 《노멜의 추적일지》는 사물에 부여되어있는 관습적이고 인습적인 의미로부터 이탈하여 사물의 자리를 재설정한다.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고정과 불변의 대상으로서의 사물이 아니라 변이의 가능성을 내포한 채 계속해서 변화하는 도중에 있는 사물이다. 전시 제목에 적힌 ‘노멜(NOMEL)’은 ‘레몬(LEMON)’의 영어 철자를 뒤집은 것으로, 작가는 레몬을 지시하는 기호를 재배열하여 지시체 뿐만 아니라 그것을 향해있는 언어의 표면까지도 다시 살핀다.

  관객은 양 칸막이를 통해 형성된 길로 진입하며 ▲<어느 날 레몬 옐로우가 사라졌다> ▲<레몬의 껍질 연구> ▲<어느 날 사라진 레몬 옐로우> ▲<레몬의 질감 연구> ▲<레몬의 무게 연구> ▲<레몬 리서치> 등의 작품들과 하나씩 마주하게 된다. 관객으로서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레몬을 포함한 모든 사물이 결국 편집을 거쳐 만들어진 하나의 구성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다시 말해 본질적인 레몬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레몬의 고정적 본질을 탐구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변형되고 변이될 수 있는가에 있다.

△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관객은 이 길을 걸으면서 양옆의 칸막이를 둘러보게 되고 칸막이가 각각의 면으로 구획되어있다는 사실, 그리고 각 면마다 레몬과 관련한 여러 정보가 기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중 하나인 <레몬의 껍질 연구>는 다시 그 면을 여러 면으로 나누어 각 면마다 서로 다른 질감의 레몬 껍질을 펼쳐둔다. 과육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을 여러 형태로 제시하고 있는 <레몬의 껍질 연구>를 통해서도 작가가 사물을 기존의 맥락으로부터 탈각시켜 다른 가능성을 보고자 함을 파악할 수 있다. 사물의 껍질을 벗기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 껍질을 유심히 살핀 뒤, 그것이 어떻게 변형될 수 있는가까지 확장하여 질문하는 것이다.

  이 길을 다 걷고 안쪽에 있는 또 다른 공간으로 진입하면 <GUMMY>라는 비디오가 상영되고 있다. 이 비디오 역시 과정에 주목한 작품으로 어느 날 거미를 삼키고만 ‘나’가 거미가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무엇을 인지하고 감각하는가에 집중한다. 관객은 이 비디오를 감상하며 하나의 신체가 또 다른 신체와 접속하여 혼합되는 과정을 목격한다. ‘나’가 거미로 변이되어 가는 과정이 놓인 이 스크린 앞에서 우리는 신체 역시 규범에 의해 의미화된 사물임을 지각한다. 거미가 되어가는 ‘나’의 몸을 보며 규범 바깥으로 탈주하는 몸과 마주한다. 이렇듯 좌표평면 위에 이미 찍혀 있는 점 대신 연속적인 선에 주목하여 그 선이 어떤 굴곡을 지니는가에 주목하는 주슬아의 작업은 사물을 고정된 자리에 놓고 규정하는 시선 바깥에 위치해 있다.

  다시 레몬으로 돌아가 보자. 어느 날 색과 모양이 달라진 레몬을 목격한 작가의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한 《노멜의 추적일지》는 레몬의 변이과정을 추적하며 레몬이라는 결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레몬이라는 과정 속에 놓인다. 노멜(NOMEL)이라는 이름처럼 완전히 뒤집힌 자리에서 다시 시작, 즉 추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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