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고 싶어. |

토요일 점심, 카페 야외 테라스에는 공석이 없었다. 나는 방금 전 마음의 목소리에 관해 생각했다. 연인들이 주변에 옹기종기 앉아 있어서 영향을 받은 걸까. 테라스 창문이 완전히 젖혀져 밖과 안의 경계가 없었고 정확히 그 근처에 앉아 있던 나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사방에 소음으로 Cigarette After Sex의 음악이 흐릿하게 들렸다. 어수선한 그 분위기에 취했는지 덩달아 힘이 빠졌다.

내가 힘이 빠지는 이유에는 분명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오늘 아침 엄마에게 걸려 온 전화 한 통도 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단골 치과 선생님이 볼품없었던 치아를 말끔하게 만들어 주었다며 너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을 덧붙였다. 간신히 써낸 극적인 대사 옆에 위치한 커서만 계속 깜빡였다. 내 손가락은 더 이상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방의 테이블에서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인간의 목소리는 단절 없이 계속되었다. 그 강렬한 끈질김에 그들이 생물학적 종(Species)으로 보였다. 어떤 모임의 캐치프레이즈인 어떤 대화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말이 스쳤다. 저 대화는 쓸모가 있을까? 엄마한테 물어보고 싶었다.

대학에 입학하면 무조건 생긴다는 애인은 졸업이 가까워오도록 생기지 않았고 여유와 낭만이 넘친다는 대학생활은 피 말리는 학점 경쟁으로 얼룩져 있었다. 2개월 남짓 주어지는 방학도 의미 있는 활동으로 채우지 않으면 취업시장에서 도태될 거라는 공포감에 시달려야 했다.

대학교 동기인 재훈은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이상한 사람이었다. 열심히 살았으나 치열하지 않았고 애늙은이 같았으나 순수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그의 이런 말을 제일 싫어했다.

기대를 버리면 돼.

각종 탈락, 이를 테면, 연애 상대로서의 탈락, 아르바이트생, 인턴 사원, 훌륭한 딸로서의 탈락을 맞이할 때마다 그는 다시 나에게 나타났다.

내가 너한테 예방주사를 놓아 주었잖아. 항체를 미리 만들었어야지.

기대 없이 살라는 게 말이 돼? 그렇다면 왜 사는 건데. 기대 따위 없는 삶이 무슨 소용이야.

눈물 그렁한 얼굴로 마치 B사감이 러브레터를 읽는 것처럼 대답했다. 재훈의 웃음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멀리서 양복을 입고 긴 목을 뽐내는 기린이 뚜벅거리면서 나타났다. 지하철이 아니라 골목길에서도 양복 입은 기린이 나타나는구나. 물론 그 당시 나는 모기업 1차 면접에서 탈락했고 술이 만취돼서 길을 걷고 있는 중이긴 했다.

한 문단을 약간 넘는 분량의 문장들을 써 내려가고 있을 때, 김대리에게 문자가 왔다.

지원 씨, 마지막 문장 몇 개 덧붙여야 하는데 마무리가 안 돼, 해줄 수 있지?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독서 모임 홍보 문구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읽었던 책이어서 줄거리가 흐릿했다. 인터넷에 줄거리를 다시 검색했다. 책 읽은 감상을 적은 블로그 글에 신자유주의, 경쟁, 구체제, 프로, 아마추어 같은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블로그 작성자는 작가 글 중 인상적이었던 토막을 짙은 글꼴로 표시해 두었다.

함정에 빠져 비교만 않는다면, 꽤나 잘 살아온 인생. 따라 뛰지 않는 것, 속지 않는 것.

그게 쉽냐고. 나는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문장 몇 개를 적어냈다.

프로를 부추기는 세계에서 아마추어는 어떻게 생존해야 할까요?

질문을 다시 바꿔 보겠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왜 프로가 되어야만 하나요?

김 대리가 부탁했던 문구를 작성해 보내고 다시 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간신히 써놓은 몇 문장을 다시 읽어보고 있을 때 메시지가 한 통 왔다. 수면보충제 구매 링크였다. 며칠 전, 고등학교 친구에게 불면증에 시달린다고 말했는데 그 말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수면제가 아니라 수면보충제이며 약이 아니라고 강조하던 친구의 안색은 창백했다. 전주천 위로 지는 저녁 노을을 세계의 캔버스에 옮기고 싶어 했던 그녀는 사무직 영업 직군 회사에서 단기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었고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나는 스타트업 회사의 마케터가 되었다.

수면보충제를 바로 구매하려다가 장바구니 버튼을 눌러 저장하고 다시 내가 써놓은 글을 읽었다. 문장을 모조리 다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백스페이스를 길게 누르려던 무렵 메신저 답장 알림이 울렸다.

지원 씨, 훨씬 좋네. 역시 지원 씨는 이런 걸 잘한다니까.

 

이해하고 싶어. |

Cigarette After Sex의 음악이 카페 안을 다시 채웠다. 나른하고 몽롱한 선율이 노을 질 무렵과 어울렸다. 토요일 저녁 카페는 한적했다. 일행과 맥주를 마시며 다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엄마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코로나 확진자 수가 서울에 많다는데 조심하라는 내용이었다. 5시간을 연달아 앉아 있었더니 힘이 빠졌지만, 키보드 위 손은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사람들은 대화에 열을 올리느라 한자리에 오래 머물렀다. 어떤 대화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캐치프레이즈가 떠올랐다. 바로 옆 테이블에 앉 은 젊은 여자 둘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에게서 괜찮다는 말이 반복적으로 나왔다. 늦어도 괜찮아, 헤어져도 괜찮아, 그만해도 괜찮아.

어느새 밤이 돼 있었다. 조금 전 한낮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지만, 도대체 언제 밤이 내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의자를 바짝 끌어당기려고 했지만, 쉽사리 끌어당겨지지 않았다. 테라스 경계에 의자 다리가 걸려서였다. 테라스 창문틀에 빠진 의자 다리를 빼내자 완전히 안으로 들어오게 됐다.

저녁이 되자 사장은 테라스 문을 닫았다. 나는 이제 카페 안에 있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흰색의 파라솔 위로 알전구가 유일한 빛을 수놓았다. 점심의 햇볕은 하얀 파라솔 위로 내려앉은 잿빛 먼지를 비춰주었지만, 밤에는 그 하얀 천이 어둠을 밝혔다. 남색 빛을 띠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정신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내가 쓰고 싶은 건, 닥터마틴 부츠를 신은 기린이 스타트업을 창업하는 이야기다. 아니다, 하이힐을 신은 황제펭귄이 디올 앰버서더가 되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그게 아니다. 내가 아는 건 모든 것은 열린 유리병 안에 든 물 같다는 것이다. 내 기대는 처음부터 틀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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