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이해관계자들은 대체로 북한을 다면적으로 파악하기를 포기했다. 북한과 평화 관련 문제는 ‘정치적 신념’의 영역에서 다뤄져 양자택일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종용한다. 분단은 우리 삶에 여전히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많은 이들이 한반도 문제를 이미 종결된 것 내지는 무관심해도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으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분단 상황은 체제로 고착돼 우리의 의사 결정 과정과 긴밀히 작용한다. 분단 상황과 북한의 언행을 이해하고 적절한 대처를 하기 위해, 우리는 북한이 형성된 과정을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주환의 논문 「북한의 문맹퇴치운동과 성인교육체계 형성(1945~1949)」은 해방 직후부터 1949년까지 북위 38도선 이북 지역에서 진행된 문맹퇴치운동과 성인교육체계의 형성과정을 분석한다. 그는 문맹퇴치가 계몽적 차원의 문화운동을 넘어 의식화를 통한 사회적 동원이라는 정치의 문제로 발전함을 설명했다. 

   북한에서 교육 부문에 대한 개혁은 식민 잔재와 봉건 요소 청산을 위해 시작됐다. 개혁은 1945년 10월 12일에 평양에서 각 도 인민위원회 교육부장 회의를 개최해 교육 부문 사업 조직의 통일 문제를 토의한 뒤, 동년 11월 21일 “북조선 학교 교육 임시조치요강” 발표함으로써 본격화됐다. 해당 요강은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학교의 명칭을 국민학교에서 ‘인민학교’로 개칭하고, 학교 교육에서 국어와 역사 교육을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주환은 교육개혁이 ‘민주개혁’을 주도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이하 ‘임시인위’)가 성립되는 1946년 2월 이전에 이미 시작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북한은 학교 교육 개편을 추진하는 한편 북한 주민을 사회주의 체제 건설에 적극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학령을 벗어난 성인 교육방안도 마련했다. 해방 직후 북한에서는 야간학교 등지를 중심으로 주민 차원의 자발적 문맹퇴치운동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문맹자는 여전히 230만여 명에 육박했다. 북한은 19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민주개혁 본격화와 ‘인민경제발전계획’을 준비하고 있었고, 개혁 과정에서 문맹자 문제를 당면했다. 김일성은 1946년 11월 25일 임시인위 제3차 확대위원회에서 문맹퇴치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할 것과 ‘동기농촌문맹퇴치운동’을 ‘건국사상총동원운동’과 밀접히 결부할 것을 주장했다. 북한에서 문맹퇴치 운동은 해방 직후 3년간 북한 사회가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을 최대한 쏟아부은 총력전 형태로 진행돼 북한 사회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이주환의 논문 제2장은 해방 직후 문맹자 현황과 문맹자 조사 방식, 임시인위 수립 과정과 이들이 추구한 성인교육의 방향을 분석한다. 특히 민주개혁 과정에서 나타난 임시인위와 농민 간 갈등·긴장 관계 및 인민경제부흥발전계획과 기술자 확보 노력을 중심으로 서술했다. 제3장은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전개된 문맹퇴치운동의 변화상을 살핀다. 문해자 증가에 따른 성인교육의 내용과 형식이 정비되는 과정을 포착했다. 제4장은 문맹퇴치운동이 진행된 3년간 북한 사회 변화를 서술한다. 문맹퇴치운동에서 가장 큰 문제였던 교원 문제의 해결 과정과 선전 활동 및 후원 활동을 살핀 뒤 북한 사회의 변화 동력이 무엇이었는지 고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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