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에서 실험적인 예술 공간으로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있었던 건물이 사라지고, 또 그 자리에는 빠르게 새로운 건물이 들어선다. 많은 것들이 쉽게 바뀌는 요즘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것들이 있다.

  마포구 아현동, 애오개역 1번 출구로 나와 골목 사이로 들어가면 눈에 띄는 노란 외벽의 건물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높게 솟은 낡은 굴뚝만 봐도 오래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1958년부터 지금까지 60년 넘게 자리하고 있는 곳, ‘예술로 목욕합니다’라는 슬로건을 걸고 운영 중인 ‘행화탕’이다.

  행화탕은 고급 사우나의 등장과 아현동 일대의 재개발이 추진되면서 문을 닫은 후, 2016년까지 방치된 채로 있다가 무용, 사진, 건축, 음악 등 다양한 예술가들의 손을 거쳐 복합문화예술공간이 됐다. 죽었던 공간이 새롭게 살아난 것이다. 행화탕은 퍼포먼스 공연이나 작품 전시만 이루어지는 단순한 곳이 아니다. 잠시나마 머무르고 사유하는 동안 예술을 직접 마주할 수 있는 곳으로, 장르를 구별 짓지 않은 다양한 예술가들의 네트워킹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예술가든 예술가가 아니든, 함께 모인 사람들은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일시적인 공동체를 이룬다.

  현재 목욕탕으로 운영되고 있지 않음에도 기존 행화탕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름처럼 외관과 내부 모두 오랜 시간 목욕탕이었던 행화탕의 흔적들을 최대한 남겨두고 있었다. 그럴듯한 리모델링을 하는 대신, 원래의 모습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존하려 한 시도들이 인상적이다. 일부러 남겨둔 하얀 타일들과 콘크리트 조각들은 오히려 레트로한 느낌을 준다. 조금도 인위적이지가 않다.

  탈의실로 쓰던 건물을 통과해 마당으로 나가면 가파른 계단의 기름 창고와 보일러실이 있다. 왼쪽으로 좁게 난 길을 따라가면 2층짜리 주택이 보인다. 행화탕은 목욕탕 건물과 목욕탕 주인이 살았던 건물 전부를 하나의 작품처럼, 유기적으로 사용한다. 어느 곳 하나 쉽게 낭비된 것이 없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거리는 목조 계단을 하나씩 밟고 2층으로 올라가면 한쪽 모서리의 벽면이 뜯겨 그대로 노출된 아현동의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다. 크게 난 구멍은 마치 액자의 프레임처럼, 그 사이로 보이는 아현동의 모습은 큰 액자에 끼워진 오래된 사진처럼 느껴진다.

  현재 행화탕의 위치는 재개발 예정지다. 그렇기 때문에 철거 일정이 정해지면 언제든 건물을 비워야 한다. 한시적이라는 공간적 특성 때문일까, 시한부처럼 잠시나마 살아난 이 공간은 그래서 더욱 애틋하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공간 위에는 언제나 역사의 시간이 겹쳐진다. 오랫동안 기억하겠다는 건 단지 보관으로서의 의미뿐 아니라 미래까지도 닿을 수 있게끔 하는 윤리적인 행위다. 행화탕이라는 공간이 품고 있는 시간들, 두터운 겹을 쌓으며 오랜 시간 견뎌왔을 시간들을 생각해본다. 직선적으로 흘러가지 않고 끊임없이 갈라지고 있는 것이 시간이어서, 그 시간을 견딘 공간 또한 새롭게 창조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렇게 달라진 의미로서의 공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다. 시침핀을 찌른 듯 고정되지 않고 매순간 새롭게 구성되는 시간 속에서 내가 딛고 있는 땅의 미래를 함께 상상해본다. 언젠간 없어질 이 공간, 행화탕을 오래도록 기억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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