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들의 힘으로 태어나다

1906년 초, 정부의 사사관리서가 있던 원흥사 내에 불교연구회가 조직된다. 이곳에서 불교연구회의 홍월초·이보담 등과 각 사찰의 대표들이 모여 전문학교 수준의 불교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전국 16개 이상의 사찰에서 기금을 출자하기로 결의하였다. 또 2월 5일에는 이보담 등 9명의 명의로 내부(內部)에 인가신청서를 제출하여, 2월 19일에 학교 설립을 정식으로 인가받았다. 이와 함께 12개조로 이루어진 학칙을 제정하고, 교명과 교훈을 확정하였다.

먼저 학교의 이름을 ‘명진(明進)’으로 정하였는데, 명(明)은 《대학》 <총설> 편에 나오는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며, 진(進)은 ‘정진(精進)’에서 빌려온 것이다. 또 교훈을 ‘자비수선(慈悲修善)’으로 정하고, 원흥사를 교사(校舍)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학교 설립절차가 마무리되자 불교연구회는 학생모집 요강을 작성하여 각 도의 주요사찰에 학생모집을 의뢰하는 통문(通文)을 발송하였다. 당시 수업연한은 2년이었으며, 3개월에서 1년까지의 보조과를 부설하였다. 또 불교교과 외에 지리·산술·이과·역사·주산·일어·측량학·철학 등의 신학문 교과를 편성함으로써 근대적 교육방법에 의한 승려교육을 꾀하였다. 정원은 학년 별 35명으로 1학년과 2학년을 합쳐 70명으로 정하되, 보조과는 20명으로 하였다.

그해 4월 10일 홍월초를 초대 이사장에, 이보담을 초대 교장에 선출함으로써 5월 8일에는 최초의 근대 불교학교인 명진학교가 정식 개교하게 된다. 1899년 동대문구 창신동에 창건된 원흥사는 개교 당시에 교실과 강당은 물론 장서당(藏書堂)과 기숙사, 운동장까지 갖추고 있었다. 또 처음 세워진 근대 불교학교인 만큼 강사진은 국내 최고의 불교학 권위자와 신학문 전공자로 구성되었다. 명진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인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홍월초·이보담·이명칠 등이 전임으로 임명되었고, 윤치호·서광범·어윤중·김우담 등 신학문을 섭렵한 쟁쟁한 인사들이 강사로 초빙되었다.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명진학교가 근대식 불교학교로 발전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이민설·이능화·장지연 같은 원로들도 강사진에 참여하거나 특강을 통해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1908년에 사학의 말살과 폐지를 목적으로 ‘사립학교령’을 공포하면서 명진학교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용 범
소설가·동국 100년사 대표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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