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이라고 온통 TV에서 국가대표팀 축구 평가전만 방영할 때, 문득 ‘애국’이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들었다. 한 시사주간지에서 읽은 내용이었지만, 가끔 애국이란 이름 앞에 소름 돋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특히 한 광고에서 이제 막 태어난 아기를 두고, ‘4천 몇 백만 째 붉은 악마’로 규정하는 자막을 보고서는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태어나자마자 붉은 악마여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한 때 언론을 중심으로 노벨상 후보니, 대한민국의 자존심이니 하며 치켜세우던 황우석 박사와 관련해서도 그를 지지하는 집단들은 지금도 광화문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을 위해서라도 황우석 교수님의 업적을 인정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과연 ‘애국을 위해서’라고 말하며 벌어지는 행위들이 진정 모든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만병통치약이어야 할까? “아니, 애국은 지극히 당연한 가치 아닌가?”라며 의아해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도리어 진정한 애국의 길이 무엇인지 돌아보자는 제안이다.
하지만 애국이라는 이름 앞에 벌어지는 역설적인 현상 앞에선 도리어 말문이 막힐 때가 있다. 친일세력은 떳떳하게 토지반환소송을 하는 반면, 일부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여전히 냉대 받고 살아가는 현실은 애국을 위해서라면 무언가 아귀가 안 맞지 않은가? 더군다나 분단시대를 살아온 ‘한곶’ 상황임을 고려하여 지난 해 삼일절에 “빨갱이를 처단하자”며 시청 앞에서 10만인파가 모인 구국기도회를 기억해 보자. 참가자들의 손에는 어김없이 태극기가 들려 있었고, 무엇보다 연단에 선 사람들의 말에서 빠지지 않았던 구절은 ‘대한민국을 위해서’였다. 애국이라는 가치 앞에 북한은 오로지 적이고, 미국만이 동지라고 외치는 그들의 모습은 가끔 섬뜩하기도 했다.
특히 분단시대를 살아오면서 내면화한 남이냐 북이냐와 같은 이분법적인 OX놀이는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은 무수한 집단들을 역사 가운데 잊혀지게 만들었다. 지난 달 28일, 한 지상파에서 방영했던 ‘조선의용대의 발자취’도 그 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 공산당 정규군대인 팔로군과 합쳐 태항산에서 일본군에 맞서 저항한 단체임에 분명하지만, 남북 정권차원의 세력관계를 통해 잊혀진 ‘비운의 주인공’이 돼 버렸다. 먼 타향에서 소리 없이 스러져 간 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보며, 그동안 스스로 애국의 범위를 너무 좁게 봐 오지 않았는가 하는 아쉬움만 깊게 새겼다.
진정으로 애국을 위한다면 일국 중심 사랑에서 조금은 더 포용력 있는 애국을 실현하기 위해 구성원들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내 나라를 위한 애국도 좋지만,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을 좀 더 넓히는 자세가 필요한 때이다. 대한민국은 애국이라는 가치로 수많은 이들이 잊혀져 온 곳이기 때문이다. 결국 대한민국만을 위한 짝사랑은 오래 가지 못한다.

최 우 진
(사과대 사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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