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학의 역사성이나, 그 가치에 대해 회의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그리스 3부악을 연상케 한 신라 향가 ‘찬기파랑가’는 물론, 쉘리의 ‘야별’과 강엄의 ‘애강남부’를 능가할 고려 속요 ‘가시리’의 함축과 애잔한 정조미를 국풍처럼 향유했는가 하면, 얼룩배기 황소 등에 올라앉은 목동의 피리소리에 석양 노을도 쉬어 넘던 풍류, 그 선민의 육자배기 가락마다 멋 겨운 사설이 낯설지 않은, 장히 낙천적 민족성으로 문예를 향유해 온 우리 민족이다.
어디 그뿐인가. 유수한 선진 과학기술국들이 수세기만에 이룩했다는 IT산업, 바이오 생명공학, 신약품 개발 등을 불과 30여 년 만에 달성해낸 저력과, 특히 황우석 교수팀을 주축으로 한 줄기세포허브 설립 등 우리의 미래는 자부해도 좋다. 경제 역시 괄목할 위상에 와 있다. 물론 오랜 문화민족으로서의 자긍심에 남부끄럽지 않은 대접도 이번 푸랑크푸르트 도서전을 통해 세계적 주목을 받았으며, 유네스코가 정한 빛나는 문화유산도 남 못지 않게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문학의 세계화, 그 현주소다. 두루 아는 바와 같이 오늘날 한 나라의 문학적 수준은 몇 사람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냈는가. 혹은 몇 개 국어로 번역되어 지구촌 독자들의 수용미학에 충족하고 있는가. 등으로 결정되어지는 셈이다.

우리문학 경쟁력있어

우리 문학의 세계화가 늦는 이유, 곧 그 문제점과 개선 방안이야 분분할 뿐 명쾌한 대안이 있을 수 없는 우문우답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문학의 수준이 노벨문학상 수상작에 비해 낮지 않다는 사실이다. 언제부터인가. 세계화, 국제화를 부르짖을 때 ‘무엇이 세계화냐’를 정의해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 했다.
그렇다. ‘가장 전통적이고 주체적인 것’, 그것의 세계화야말로 가장 빛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적지 않은 노력과 시간, 더욱 중요한 것은 국가의 도덕성과 국제적 신임도를 수반한 국력이 따라야 한다.

작품 담론 다양화돼야

우리는 노벨문학상에 연연하기보다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고유의 전통을 이해하고 지키며, 주체성을 지녔는가, 그리고 세계인들을 인식시키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또 국가의 도덕성과 신임도는 어떠한가를 자문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모든 제도가 그렇듯 노벨문학상도 제도의 틀 속에서 심사라는 선정의 기준이 있다면 범박한 논리지만, 그 제도의 틀 속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이른바 작품의 담론도 인류가 공유할 화소의 창출, 예컨대 이데올로기의 허위와 위선의 벽을 허물 탈이데적, 혹은 인류 공동의 행복추구를 위한 친환경적 소재, 또는 종교분쟁에 따른 반테러리즘 같은 사회성 메시지를 통해 범인류적 담론에 대한 동양적 인본주의 사상 고취도 현실적 한계를 뛰어넘는 한 방편일 수 있으리라.
그러나 보다 더 근본적 대안은 화자의 정확한 메시지 전달, 곧 우리 문학의 정조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번역의 문제라 할 것이다. 언어 예술인 문학에서의 언어가 갖는 다양한 뉘앙스, 특히 음성언어이되 우리말 화한 그 많은 표의문자의 심상 전달은 지난한 과제다. 더욱 유난히 발달한 우리말의 부사와 다양한 수식어 번역은 전문 번역 인력 양성 없이는 불가능하다. 1925년 노벨 문학상을 받고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세계문학상을 생각해낸 건 참으로 언어도단”이라고 푸념했던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와 같은 냉소가 아닌 진정한 수혜국이 되기 위해서라면 작가들의 의지에 못지 아니한 국가적 지원이 필수적 과제임을 제언해 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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