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청탁서를 받았으나 생각이 쉽게 모이지 않는다. 그냥 술친구로 괜찮은 사람, 연기 잘하는 사람, 학식이 높은 사람, 뜻이 훌륭한 사람들은 있지만, 풍부하고 신선한 감성과 예리한 비판력과 아울러 실천력까지 갖춘 인물, 삶 자체가 매력적인 사람은 주위에서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떠올린 사람이 얼마 전 세상을 뜬 미국의 여성 에쎄이스트인 ‘수잔 손탁(susan sontag)’이다.
우리나라에서 에쎄이라고 하면 다소 감상적인 취향의 신변잡기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우리 문화예술인들은 일반적으로 관심분야가 좁거나 자기 전공에 갇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도 연극이라는 마이너리티 동네에서 비평이란 것을 하고 있지만 항상 답답하고 목이 마르다. 이런 내게 수잔 손탁은 대학 때부터 동경의 대상이었다. 여성적이지도 남성적이지도 않은 서늘한 지적 눈매와, 자신의 트레드마크인 수수한 폴라 넥 스웨터를 입은 모습부터 매혹적이었다.
손탁의 에쎄이는 현대사회의 병적 징후들을 예리하고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기도 하거니와 그 자신이 에쎄이스트이자 문화비평가이자 소설가이자 희곡작가이자 실천적 지식인으로 전 생애에 걸쳐 눈부신 활동을 했다.
그의 초기작 ‘해석에 반대한다(1966)’는 지적인 도발성과 세련된 취향으로 당시 수입된 모더니즘의 엄숙주의에서 헤매는 촌스러운 미국 지식인들의 허를 찔렀으며 ‘사진에 관하여(1977)’는 사진영상이 현대인의 감각과 인식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최초로 본격 고찰한 글이다.
스스로 병마에 시달리던 그는 ‘은유로서의 질병(1977)’에서 나병·결핵·페스트·암·에이즈 등 질병이 지닌 시대적 상징성을 사유했으며 ‘타인의 고통(2003)’에서는 최근 이라크 전쟁 등에서 타인들의 고통이 영상 스펙터클로 소비되는 현상을 고발하기도 했다.
그의 비판정신은 지면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중년 이후 더 실천적이 되었는데 유고 내전 때 전투중인 사라예보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하기도 하고 최근에는 9.11 테러에 대한 미 정부의 입장을 비판하는 등 정치적인 입장개진에도 적극적이었다.
나라 전체가 무력증과 냉소에 빠져있고 그런 가운데 사회 각 분야에서는 양극적인 갈등과 반목이 그치지 않는 요즈음,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이며 지식인으로서 살아가는 일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회의조차도 무뎌 가는 요즈음, 부끄러움으로 손탁의 글과 삶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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