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군국주의의 모습을 메이지유신의 전후와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설명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1868년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은 일본을 중세와 근대를 나누는 중요한 기점이다. 일본의 중세는 막부의 번주에 의한 무가정권의 통치였다. 무가정권을 지탱할 수 있었던 집단인 사무라이(무사)계급의 출현으로 고대와 중세로 나눌 수 있다.
무사계급은 칼로써 모든 것을 말하는 집단으로 싸움의 기술과 힘의 세기로서 집단내 서열을 가르던 그들은 12세기말에는 주인으로 섬기던 귀족에 대항하여 무가정권-바쿠후를 창건했다.
그 후 새로운 계층으로 대두되었던 농민과 상공업자들을 칼의 힘과 논리로 제압하고 약 700년에 걸쳐 일본 정계를 주도한 무가정권은 1866년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일왕제(日王制)의 근대적 통일국가에 흡수되었다.
무사들은 칼 휴대를 금지 당했고 봉건 영주 제도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무사도는 일왕제 근대 국가의 군대에 계승되었다. 봉건의 지배층이 산업발전을 주도한 일본은 봉건에서 근대로의 이행에 있어야할 민중적 정치, 사회적 변혁이 배제 되었고, 이것은 정부 주도의 군국주의로, 그리고 군국주의는 제국주의의 침략적인 모습으로 근대의 일본을 무장시켰다.
19세기는 서구의 선진자본주의 열강이 제국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였다. 일본은 서구 열강의 위협에 의해서 동아시아에서는 가장 빠르게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이미 임진왜란 동안 새로운 무기인 총포로 전쟁의 승리를 맛본 일본은 개방과 함께 더욱 빠른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적국가의 기틀을 정비한 일본은 조선을 필두로 아시아 침탈을 자행했다. 40여년의 제국주의적 아시아 침탈은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을 끌어 들였고, 핵폭탄으로 제국의 침탈을 마감했다.
이렇듯이 일본의 역사는 칼의 역사이며 전쟁의 역사이다. 끊임없는 전쟁을 치룰 수 있는 정신적인 모태는 야스쿠니 신사이다.
야스쿠니는 일왕이 직접 참배하는 신사이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이후 1938년부터 일왕은 일본의 유해군 대원수의 자격으로 군복을 입고 봄, 가을로 전국의 유족을 초대하여 전사자의 공적을 찬양하고, 영령을 위령하는 의식을 치른다.
나라를 위한 순국열사의 뜻을 기리는 단순한 장치가 아니고 나라를 위해 죽은 군인들을 신으로 승격시킨다. 여기에는 패전 시에 자살한 군인들도 신으로 승격하는데 이것은 전쟁 발발에 대한 책임의 모습이 아니며 전쟁 자체에 대한 일왕, 그리고 일본정신의 단면이기도 하다.
어떤 이유로든지 전쟁에 나가 죽은 자들을 사후에 신으로 추대하는 국가적 의식은 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것이다.
이것은 전쟁에 대한 미련의 대표적인 모습이며, 패망후의 군사적인 재무장과 전쟁권의 포기를 명시한 평화헌법을 위협하며 극우집단들이 원하는 일본의 재무장을 부추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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