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8일은 ‘철도의 날’이다. 철도는 산업혁명과 같이 등장했다. 이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인간생활 모든 부분에서 비약의 계기가 됐다. 이에 철도역사부터 현대까지 미치게 된 영향을 알아보자.
편집자

철도는 지구촌의 환경문제를 해결하고 에너지 효율성과 안정성에서 다른 수단을 능가한다.
철도가 18세기 산업혁명을 이끌었던 증기기관에 이어 21세기에 다시 한번 르네상스를 맞을 것이라는 소리도 이 때문이다.
그 옛날 실크로드를 따라 동서양을 오가던 대상(隊商)들이 이용했던 낙타의 평균 시속은 8마일이었다. 시속 20마일의 속도를 낼 수 있었던 이륜마차가 등장한 것이 기원전 1600년쯤이었고 시속 100마일의 증기기관차가 나온 것은 1880년대였다. 시속 20마일에서 100마일까지 오는 데 3천년 이상 걸린 셈이다.
1825년에 청년 디젤(Rudolf Diesel)에 의해서 최초로 등장한 증기기관차의 최고 속도는 겨우 13마일이었다. 스톡턴과 달링턴을 잇는 짧은 거리, 시속 10~20㎞에 불과한 느린 속도였지만 철도는 공간을 좁히고 시간을 단축시켜 근대 문명의 총아로 자리잡았다.
첫 증기기관차의 이름은 ‘여행’이라는 뜻의 ‘로커모션’이었다.
제작자 조지 스티븐슨은 1814년에 이미 ‘블루허호(號)’라는 최초의 기관차를 만든 적이 있으나 이것은 석탄을 광산 밖으로 실어나르는 ‘무개 화차(無蓋 火車)’였을 뿐 엄밀한 의미에서 철도 기관차는 아니었다.
1830년 9월에는 무역항 리버풀과 산업혁명의 중심지 맨체스터 구간을 스티븐슨의 아들이 제작한 ‘로켓호’가 달림으로써 영국의 산업혁명은 완성단계에 접어들었고, 물류 수송에는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이후 프랑스(1832년) 독일(1835년) 오스트리아(1837년)로 철도가 보급됐으나 이들 국가들은 아직 산업혁명을 꽃피우지 못해 영국의 자본과 기술을 필요로 했다. 증기기관으로 대변되는 산업혁명은 전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증기기관의 발명이 모태가 되어 발달한 교통수단뿐만 아니라 정보의 흐름도 날이 갈수록 빨라져서 이제는 전 지구촌이 정보 동시화시대에 살고 있다.
1865년, 런던 시민들이 링컨 암살소식을 들은 것은 12일 뒤였다. 그러나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 피격사건 때 어느 영국 특파원이 이 소식을 들은 것은 런던 본사의 전화를 받고서였다.
피격현장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있던 특파원보다 영국 본사가 먼저 알고 전화를 한 것이다.
철도의 발달에 의한 산업혁명은 단순히 경제구조의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정치적 사회구조도 크게 바꾸었다.
정치적 변화로서 주목할 만한 것은 산업부르주아지 발흥의 결과, 그때까지의 귀족·지주지배의 정치체제에 동요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신흥 산업부르주아지는 1832년의 선거법 개정을 쟁취함으로써 피선거권을 부여받았고, 한편으로 노동자계급도 성년 남자에 대한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면서 차티스트운동(1838~48)을 통하여 하나로 뭉쳤다.
이러한 정치투쟁은 자본주의체제가 내부에 안고 있는 자본가와 임금노동자의 모순 대립과 뒤얽혀서 영국사회를 크게 뒤흔들었다.
19세기를 통하여 공업화는 영국으로부터 프랑스·독일·미국·러시아·일본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공업화를 민간의 자생적 노력으로 달성한 나라는 영국뿐이고, 후발 여러 나라의 공업화는 영국 기계에 의하여 생산된 제품의 대량 유입을 막고 국내자본의 보호육성을 꾀하기 위한 보호관세정책을 취하는 등, 국가의 적극적 공업화정책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이리하여 세계경제는 철도를 기반으로 한 영국을 축으로 하는 여러 선진 공업국과 이에 종속적인 식민지적·반식민지적 여러 농업국으로 나뉘어, 이것들이 지배와 피수탈의 유기적인 관계로 결속된 세계자본주의로 재편성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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