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은 수많은 정치파동을 일으키며 영구집권을 꾀했던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12년에 걸친 장기집권을 종식시켰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제2군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육군사관학교 8기생 출신 군인들은 장교 250여 명 및 사병 3,500여 명과 함께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고,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해 ‘혁명공약’을 발표하며 군사혁명을 성공시켰다. 이러한 군사쿠데타의 승리는 장기집권으로 이어진다.
1972년 10월 17일 당시 제2인자였던 김종필을 무력화 시키며 1인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한 초헌법적 비상조치인 유신체제가 성립됐다. 10월유신 이후로 사회민주화에 대한 민중의 요구는 더욱 거세졌으며, 1979년 10월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반대한 부마사태가 일어났다. 박정희는 군을 출동시켜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이로써 부마사태는 잠잠해 지는 듯 했으나 26일 박정희가 사망함에 따라 유신체제의 종말을 고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 등이 중심인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는 박정희가 살해된 10·26사건의 혼란한 정국에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전두환 등의 신군부세력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했다. 이 후 각각 계획·조직적인 모습으로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해 육군지휘부를 무력화시켰다.
신군부세력은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며 그 등장의 희생양으로 1980년 광주를 이용했다.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라남도 및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 등을 요구하며 일어난 민주화 운동을 북의 사주를 받은 불순분자와 폭도들에 의한 난동으로 호도하며 잔인하게 탄압했다.
이 기간 동안 4,312명(사망 154명, 행불 70명, 상이 기타)의 희생을 치렀다. 20세기 근현대 들면서 크고 작은 민중의 항쟁은 실패로 끝났지만 5·18민중항쟁은 사회변혁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지식인 중심의 변혁운동에서 민중운동으로 무게중심의 이동을 가져왔고, 그때까지의 미국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며, 사회운동의 목표를 구체화·다변화시켰다.
정권찬탈의 야욕으로 정부 공권력을 이용하여 국민을 상대로 감행한 군사작전으로 5·18민중항쟁은 너무나 큰 상처로 기억됐지만, 민중의 자발적인 개혁운동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항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5·18민중항쟁은 깨어있는 민중이 민주사회 발전의 원동력임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남한 정치에 있어 민주화와 민족의 통일, 그리고 평등 세상을 향한 사회진보운동의 커다란 기점으로 자리를 잡았다.
당시에는 무지막지한 진압으로 패배적인 시각에서 5·18민중항쟁을 바라보았지만 이후에 이어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무단·불법으로 계승한 전두환의 제5공화국 정권의 부도덕성을 만천하에 드러낸 결정적인 증거가 됐으며,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맞선 민중의 자위적 무장항쟁이 국민저항권의 적극적 행사로 인정됐다.
5·18민중항쟁 당시에 보여준 광주시민의 높은 나눔과 자치 그리고 연대의 공동체 정신은 세계 진보진영의 사람들의 인상에 민중항쟁의 상징과 개인인권과 국민(시민)인권선언의 행동으로 자리 잡고 있다.
5·18민중항쟁이 보여준 이러한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은 우리가 당면한 역사적인 사명으로 생각하고 우리의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