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불교가 소개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이 시기의 불교 전래는 다른 아시아 각 나라들처럼 엄청난 문화적 충격 그 자체였다. 그것은 단순히 종교적 의미를 넘어 문화적·정치적·사회적으로 모든 부분에 있어 커다란 변화를 의미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가장 먼저 받아들여

삼국 가운데 고구려는 가장 빨리 불교를 받아들였다.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에 전진의 순도에 의해 처음 전해졌고 광개토대왕 때 이르러 전국에 많은 절들이 세워진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불교는 확고한 기틀을 잡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저력을 바탕으로 국외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데 이는 중국 삼론종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승랑이나, 일본의 호류사의 금당벽화를 그린 담징 등의 활약상에서도 엿볼 수 있다.
백제는 침류왕1년(서기 384년)에 동진의 마라난타에 의해 불교가 전해졌고 무왕 때 익산의 미륵사라는 거대한 규모의 절을 통해 백제 불교 또한 크게 융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많은 고승들이 많이 나타났고 그 가운데 겸익은 일찍이 불교의 기원지인 인도까지 유학하고 돌아오는 국제적인 수준을 보여준다. 경전을 번역하고 율종(律宗)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이 외에도 담혜, 도심 등은 일본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라의 경우 법흥왕 15년(서기 528년)에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는 본격적으로 전해져 진흥왕 때 이르러서는 국교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다. 고구려와 백제와 같이 수많은 고승들을 배출했고 그 가운데 원효, 의상은 지금도 유명하다. 신라 불교는 삼국통일·불교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그래서 전성기 통일신라의 불교문화예술은 건축, 공예, 회화, 문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꽃을 활짝 피웠다. 대표적으로 불국사의 석굴암이 있다.
통일신라말기가 되자 도의 등 당나라에 유학한 스님들에 의해 선불교(禪佛敎)가 소개됐다. 선불교는 참선을 통해 부처를 이루려는 것으로, 당시 큰 세력을 떨치고 있었던 교학불교였던 화엄(華嚴)불교와는 여러 가지로 비교가 됐다. 이러한 선불교는 기존의 불교가 크게 세력을 떨치던 중앙보다는 주로 지방으로 내려가 활동을 하였는데 이로써 ‘9산 선문’이 성립되어 교학의 5개 파와 더불어 ‘5교9산(五敎九山)’의 시대가 열렸다.

여러 종파 성립된 고려시대

고려의 왕건 때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으며, 현존하는 사료에도 ‘조계종(曹溪宗)’을 비롯한 많은 불교 종파 이름이 나타나는 시기이다.
조계종은 신라 말의 ‘9산 선문’이 형성되면서 하나의 종파로 성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대각국사 의천은 중국 유학에서 천태종과 선종을 배우고 돌아와 천태종으로 여러 종파들을 통합하려 시도했다.
다시 지눌은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려고 했던 의천과는 달리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려 했다. 이러한 지눌의 노력은 당시 불교계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이 후 삼국유사로 유명한 일연이 나와 고려의 불교계를 이끌었으며 고려말기에는 경한, 보우, 혜근 등이 나와 선종을 더욱 중흥시켰다. 그 가운데 보우선사가 종래의 9산 선문을 통합하여 ‘조계종’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려불교의 대표적인 문화적 위업은 세계적 문화재로 손꼽히며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대장경 주조이다.

해방 이후 현재까지

조선에 이르러 불교는 억불이라는 큰 시련을 당하게 되었고 당시 모든 종파는 선종과 교종으로 통폐합됐다. 그러다가 조선말기 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등의 명칭이 다시 등장했다.
일제시대에는 ‘조선불교선교양종’이라 불리던 종단의 이름을 1941년에 ‘조선불교조계종’이라 이름 하였다. 다시 해방을 맞이해 ‘한국불교조계종’으로 이름으로 바꾸었으니 이는 한국 선불교의 전통적 종명을 되찾은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의 전개과정은 그리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이승만의 정화유시 이후 비구승과 대처승의 대립으로 인해 비구승단인 조계종과 대처승단인 태고종으로 크게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밖의 천태종, 진각종 등 약 32개 이상의 많은 군소 종단들이 출현하여 현재 조계종과 함께 발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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