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문제가 국제적 이슈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89년 미국의 정찰위성과 프랑스 상업위성이 포착한 영변 핵 단지 내 시설들이 외부에 공개됨으로써 비롯됐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측은 북한이 85년 12월 NPT(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하고도 핵안전협정 체결을 기피한 채 핵개발을 추진해 온 점을 중시, 제33차 IAEA(국제원자력기구) 총회 개막 직전인 89년 9월 비공개 이사회에서 북한에 대해 핵안전협정 체결 의무를 이행토록 촉구했다.
이후 북한 핵문제는 IAEA 회의 때마다 주요 의제로 등장했다.
그러나 북한 핵문제는 소련 및 동구 공산국가의 몰락·독일 통일·걸프전 등과 같은 큼지막한 사태로 인해 국제적인 문제로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
걸프전이 끝난 후인 91년 4월, 미국의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주요 언론들이 북한이 수년 내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다는 기사를 게재함으로써 북한 핵문제는 국제적으로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당시의 국제정세는 전략무기 감축협정(START)이 타결되고 화학무기 폐기를 위한 제네바 회담이 진행되는 등 대량살상무기의 폐기를 통해 화해와 평화를 지향하는 국제적 신 데탕트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북한의 핵개발은 시대착오적인 도전이라는 점에서 국제적 거센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고 필연적으로 핵개발 저지를 위한 국제사회의 압력이 거세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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