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관세화 유예 협상 비준동의안’의 통과여부가 결정될 국회본회의가 열리는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은 아침 일찍부터 만약에 발생할 물리적 충돌을 대비해 진영을 꾸리기 시작한 경찰들로 살벌한 분위기였다.
오전 9시 30분. 국회 정문 앞이 소란스러워졌다. 국회로 들어가려는 시민, 혹은 기자들과 이를 막는 경찰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진 것이다. “오늘은 국회 출입증이 없으면 못들어간다”고 완강히 막아서는 경찰들. 민주노동당이 10시에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쌀협상 국회비준 저지 기자회견’을 개최하지만 이 날만은 기자 중에도 국회출입기자만 들어갈 수 있단다. 일반인들에게 당당하지 못할 일을 하는 것일까. 혹시나 출입증 없는 ‘일반인’이 들어갈지 몰라 차량점검까지 꼼꼼히 하는 모습이었다. 그 옆에서 ‘쌀비준 반대’ 팻말을 목에 걸고 1인 시위하는 농민의 모습이 쓸쓸하기만 했다.
오전 10시. 국회 정문 너머 계단에서 민노당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소속의원, 비대위원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비준안 처리를 막겠다”고 다짐한 뒤 국회로 들어갔다.
한 시간 뒤 국회 앞 국민은행 앞에서 전국농민회총연맹과 쌀 비대위, 전국민중연대의 ‘쌀협상국회비준 저지를 위한 시민단체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전국민중연대 전광훈 상임대표는 “국민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쌀 비준안을 강행처리한다면 국회와 정부 껍데기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모두 “노무현정권과 열린우리당, 한나라당은 농민들과 국민들의 분노를 직시하고 쌀협상 비준 이전에 먼저 농업과 농촌에 희망을 줄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하라”며 주장하고 기자회견을 마쳤다.
한 시간 가량 진행된 이 기자회견이 끝나자 주변에 대기해 있던 경찰들이 본격적으로 진열을 갖추기 시작했다. 오후 2시에 같은 장소에서 민노당과 민중연대, 쌀 비대위의 결의대회가 계획돼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15일 열린 농민대회에서 경찰과 농민간의 충돌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해서인지, 경찰은 각 지방에서부터 농민의 상경 자체를 막아 투쟁은 전국각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 날 결의대회도 서울 인근 수도권에 있는 각 시민단체들과 대학생들만의 소규모 참가가 예상됐다. 하지만 경찰은 보다 단단히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오후 2시, 결의대회가 시작됐다. 약 200명가량의 소수만이 참여해 “12월 중순에 열릴 WTO 협상 이후로 비준안 통과를 미뤄라” “식량주권만은 뺏기면 안된다” 등을 목이 터지게 외쳤다. 그러나 이들의 외침은 국회 정문 앞 넓은 도로에 쓸쓸히 울려 퍼질 뿐이었다.
그 시간, 길 건너 국회에서는 본회의가 개최되려는 중이었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은 쌀 비준안 처리 안건을 가장 처음으로 올려놓은 채, 민노당 의원들과 보좌진들의 본회의장 진입을 막고 있었다. 국회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 못 들어가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런 웃지못할 일에, 민노당 의원들이 곧 본회의장 진입과 의장석 점거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2시 40분 즈음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민노당 의원들을 의장석에서 끌어내리는 등의 몸싸움이 벌어지고 결국 3시 10분을 전후해 쌀협상 비준안 찬반표결이 실시됐다. 그리고 채 5분도 안돼, 총 223명 중 △찬성 139 △반대 61 △기권 23으로 비준안이 통과됐다.
결의대회장에 곧 이 소식이 들려오자 대회 참가자들은 참담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곧 쌀협상 국회비준 반대 비상대책위원회는 “이 순간부터 노무현 정권 타도투쟁에 돌입할 것”이라며 “수입쌀이 이 땅에 들어올 수 없도록 죽을 때까지 투쟁할 것”이라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대회에 참가한 항공대 강동기 총학생회장은 “이 사실을 학교로 돌아가 학생들에게 알리고 다음달 1일 열릴 전국농민대회때 함께 연대투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비준안 통과 후 대열은 국회 모형을 태우는 상징의식을 행한 뒤 국회 진입을 시도 했지만 경찰에 막혀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농민가를 부르며 다음을 기약했다. 이들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만이 대한민국 350만 농민들의 심정을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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