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석
사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1990년 2월, 하버드 법학전문대학원의 학술전문지 ‘Harvard Law Review’ 편집실은 새로운 편집장의 선출을 놓고 격론이 이어졌다.

당시의 하버드 법대는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격렬히 대립하였고, ‘Harvard Law Review’의 편집부는 그러한 논쟁의 핵심에 위치했다. 계속되는 투표와 논쟁 속에서 회의가 늦은 저녁까지 계속되던 어느 시점, 보수파의 한 백인 학생이 발언을 자청하였다. “나는 버락 오바마를 ‘Harvard Law Review’지의 편집장으로 지지합니다. 버락 오바마와 나는 분명히 여러 이슈에서 견해를 달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이념적으로 갈등하고 반목하는 상황에서 오바마 만이 모두를 끌어안고 포용할 수 있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미국 최고의 법학전문학술지 ‘Harvard Law Review’ 104년 역사상 최초의 흑인 편집장은 이렇게 탄생하였다.

 

미국최초의 흑인 대통령

2008년 11월 4일 미국은 제44대 대통령으로 버락 오바마를 선택하였다. 오바마는 선거인단 349명을 획득, 162명에 그친 메케인을 압도하였으며, 전체 유권자 득표율에서도 과반수를 훨씬 상회하였다.

이번 대선에서 오바마는 약 1억 3천만명에 이르는 전체 투표 참가자들 중에서 역대 최다인 6천325만표(약 52%)를 얻는데 성공했다. 이는 지난 1964년 대선에서 당선된 린든 존슨 전 대통령 이후 민주당 후보로는 가장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 것이다.

부시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플로리다, 버지니아, 오하이오의 경합주 (swing states) 또한 오바마의 손을 들었다. 링컨이 노예해방을 공식적으로 선언한지 150 여년, 1960년대의 민권법, 투표법을 통해 흑인들이 실질적인 참정권을 획득한지 43년 여 만의 흑인 대통령의 탄생이었다.

 

오바마에 대한 기대감

오바마의 당선은 미국 건국 232년만의 최초의 흑인대통령의 의미를 넘어 미국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연 것으로 평가된다. 이번 미국 대선은 1960년 케네디-닉슨 선거이후 유권자의 참여가 가장 두드러진 선거였다. 흑인, 히스패닉 계층은 물론 정치에 무관심했던 청년층이 대폭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정치엘리트의 교체와 함께 정치참여에서도 미국정치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

오바마의 당선은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인 흥분과 기대를 불러오고 있다. 올 초 오바마의 유럽 방문길에서 베를린 광장에 모인 20만 명의 인파는 미국의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기대를 단면적으로 드러내는 예이다.

미국 대선결과를 지켜본 많은 이들은 미국이 종전 팍스 아메리카나의 오만함을 버리고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추구하는 새 시대로 나아가길 기대하고 있는 눈치다.

“이란, 쿠바, 북한 등과 같은 적성국과도 먼저 대화를 시도하겠다”라는 오바마 외교정책의 기조는 오랜 경색일변도의 한반도 정세에도 화해와 협력의 새로운 바람을 불러올 것이라는 기대를 부풀게하고 있다.

우리 내 정파와 언론들도 오바마의 당선이 한반도의 정세에 미칠 영향에 대한 평가는 제각각이다. 진보세력은 새로운 진보의 세기, 새로운 북미화해의 시대가 열린다며 자축하고 있고, 보수 세력은 나름대로 ‘유약한’ 미국이 북한의 무리한 요구에 질질 끌려 다니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 형국이다.

 

오바마에 대한 환상

오바마의 당선이 역사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의 오바마에 대한 ‘장밋빛’일변의 기대는 지나친 감이 있다. 먼저 우리가 인지해야 할 것은 오바마 역시 미국 기성정치권을 통해 등장하고 성장한 인물이란 점이다. 오바마가 연방정치권에서는 참신한 인사이고, 최초의 비백인 대통령임은 분명하지만, 오바마는 시카고 주 상원의원을 3회 연속 역임한 베테랑 정치인이다. 오바마의 연방 상원의원 법안투표를 살펴보면 오바마의 이념적 성향은 힐러리 클린턴이나 민주당의 지도부와 커다란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오바마가 외치는 이념과 인종, 성별과 세대의 갈등을 넘어선 화합과 통합의 리더십은 어디까지나 미국 내부에 국한된 것이요, 여전히 미국 대외정책의 근간은 미국의 국익이 우선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오바마의 외교가 부시 행정부의 일방적 미국우월주의와는 색깔을 달리할 것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오바마가 한반도에 평화를 선물할 것이라 보는 시각도 지나친 기대심의 발로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오바마 또한 공화당의 매케인 후보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국익에 위해가 있을 경우 “무력의 활용이 있을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오바마는 대통령 취임 후 이라크에서 16개월 내의 철군을 약속하고 있으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탈레반-알카이다 색출작전의 강화는 물론, 필요시 16,000 여명의 미군을 증파할 것을 공언하고 있다.

부시행정부가‘북한’을 악의 축으로 보았던 것과는 표현과 정도는 다르지만, 오바마와 민주당에게도 북한은 여전히 불량국가임은 자명하다. 미국은 집권 대통령이 누가 되었던 간에 자국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대외정책을 결정하여 왔다는 사실도 변하지 않았다. 한반도의 긴장완화는 미국 내의 변화는 물론, 주변의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양상을 달리할 것이다.

 

냉철하고 전략적인 대처 필요

매케인이 당선될까봐 전전긍긍 우려할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현재 오바마의 당선에 희희낙락할 필요도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바마 정부의 움직임을 침착하고 차분하게 예의주시하며, 전략적으로 대처하는 냉철한 셈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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