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곳곳 항일유적지 탐방 … 부실한 유적관리 아쉬워

동대신문사는 지난 방학기간 동안 유관기관과 함께 독립투사들의 얼이 서린 헤이그 특사단 탐방 취재를 했다. 그리고 고구려유적 탐방과 러시아 항일유적지 탐방 취재도 함께 진행했다. 이에 생생한 현지 취재 결과를 2회에 걸쳐 나누어 싣는다.                                                              편집자
 

2007 대학생 헤이그 특사단 탐방기- 독립투사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이준, 이상설, 이위준 세 명의 특사가 헤이그에 첫 발을 내딪은 덴 하의 HS역

‘63일간의 지독한 강행군, 좌절 그리고 희망’ 100년 전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그 장소, 의미, 감정 모두를 생생하게 느끼고 돌아왔다. 국가보훈처와 대학내일이 주최한 행사로 대학생 기자단이 이준, 이상설, 이위종 헤이그 특사 3인을 따라 18인의 헤이그 특사단이 되어 생생한 취재를 위해 파견됐다. 지난 7월 8일, 특사단은 우리나라부터 네덜란드 헤이그까지 100년 전 헤이그 특사들이 걸었던 그 길을 따라가는 멀고 험난한 8박 9일의 여정을 시작했다.

러시아의 최대 독립운동지 블라디보스토크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러시아 독립운동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우수리스크 및 블라디보스토크였다. 헤이그 특사단이 부산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를 타고 긴 일정을 시작했듯 우리도 속초항에서 자루비노항까지 배를 타고 출발함으로써 일정을 시작했다.

러시아에서 제일 먼저 만난 최재형의 두 번째 거주지는 현재 평범한 러시아인의 가정집이 되어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국민회를 조직하고, 의병을 모집하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펼친 독립운동가의 유적지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일정이 계속 돼 갈수록 이처럼 방치되어 있는 우리의 유적지들이 적지 않아 안타까웠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 위치한 신한촌 기념비를 거쳐 이상설 유허비에 도착했다. 이상설선생 유허비는 인적이 아주 드문, 외딴곳에 수이푼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이푼강은 이상설 선생의 유해가 뿌려진 곳이기도 하다. 김용달(독립기념관) 지도교수의 “유허비 주위에 이 나무들마저 없었더라면 얼마나 쓸쓸했겠냐”는 말이 다 말라 사각거리던 꽃다발만큼이나 씁쓸하게 느껴져 마음이 찡했다.

현지인은 모르는 하얼빈역 1번 탑승구

헤이그까지 도착하기엔 빠듯한 일정 때문에 러시아를 등지고 중국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곳은 마치 중국이 아닌 냥 바로크풍, 르네상스풍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어 동방의 작은 파리라는 말을 실감케 했다.
또한, 많은 볼거리를 지닌 도시이지만 우리에게는 더욱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도시이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 기념당, 하얼빈역 탑승구는 그저 ‘이토히로부미 저격’이라는 메마른 상식으로 존재하던 안중근 의사를 마음속에 다시 새겨보게 했다.

하얼빈역 승차장에는 안중근 의사의 위치는 세모, 이토히로부미의 위치는 마름모로 바닥에 표시되 있지만 안내표지 하나 없었다. 이는 중국정부가 정책상황에 따라 안내판 설치와 해체를 반복하고 바닥의 표지 또한 없앴다 다시 만든 것이라 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그냥 모양다른 타일이지만 우리에게는 역사의 현장인 그곳에서 그 때 당시를 재현해 보기도 하고 차례차례 표시를 밟아보기도 했다.

하얼빈시에서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731부대. 1939년 이시이 시로가 창설한 생화학 실험기지인 731부대는 생체실험을 한다는 핑계로 온갖 만행을저질렀다. 현재는 일본 패망 후 731부대원들이 건물을 모두 폭발시키고 도망쳐 장교기숙사만 남아 그 시대의 참상을 보여주고 있다. 현지가이드 이상빈씨는 “이 곳에 들르고 나면 항상 화가 나고 기분이 좋지 않다”며 “이 주위 아파트들은 하얼빈 시에서 집값이 가장 싼 곳”이라고 귀띔해주기도 했다.

긴 여정 끝에 도착한 네덜란드 헤이그

여러 독립운동 유적지를 거쳐 가며 마음아파하기도, 즐거워하기도 하던 우리는 12일 최종 목적지인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했다. 길고 지루한 이동시간의 피로를 털고 다음날 헤이그에서 진행된 일정의 시작은 대학생 헤이그 특사단 대표로 참여하게 된 ‘헤이그 특사 100주년 국제학술회의’였다.

오후 4시까지 진행된 학술회의에 우리나라 학자들의 발제뿐만 아니라 외국 학자들의 발제도 있어 인상적이었지만 그 중 이준 기념관의 이기항, 송창주 관장의 발제가 잊혀지지 않는다. 이들 부부가 준비한 헤이그 특사 자료집은 두 사람의 끝없는 열정과 노력의 결정체였다. 이렇게 우리의 역사를 기억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을 해나가는 두 분께 정말 감사했다.

학술회의가 끝난 후에는 헤이그 특사단이 투숙했고 이준 열사가 순국한 옛 드용호텔, 지금의 이준 기념관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헤이그 시내를 걸어 헤이그 특사가 도착했던 제2회 세계평화회의 개최 장소인 비넨호프 왕궁으로 향했다. 비넨호프를 바라보니 헤이그 특사 3인이 절망하는 모습과 다른 방법을 모색하려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 했다.

또 계속 시내를 걸어 특사단이 도착했던 역인 헤이그 덴하의 HS역을 둘러보기도 했다.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가까운 카페에서 헤이그 특사 3인의 눈물과 아픔, 그리고 기자회견을 다시 재현하기도하고 정의와 힘에 대한 토론을 나누기도 했다.

헤이그 특사 파견 기념행사와 사람들

7월 14일. 이날은 1907년 이준 열사가 순국한 날이고 2007년 이준 열사의 순국을 기리며 헤이그 특사 파견 100주년 기념식이 열린 날이다. 뿐만아니라 헤이그시에서 이들을 기려 ‘평화의 날’로 지정한 특별한 날이기도 하다. 헤이그 특사 파견 100주년 기념식은 이준 열사 기념관 주위에 위치한 뉴케르크 교회에서 열렸다. 많은 인사와 교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진 이번 행사에서는 다양한 퍼포먼스와 공연, 비둘기 날리기 등 여러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행사가 끝난 후 많은 사람들은 둘러 앉아 제공된 간식을 나눠먹으며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교회 안팎의 풍경에 맑은 날씨와 어울리는 맑은 웃음들이 흩뿌려지고 있었다.

100년 전 그들이 없었더라면, 암담한 현실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했던 선열들이 없었더라면 볼 수 없었을 장면일 것이다. 이 맑은 웃음을 잃어버리는 슬픔을 다시 겪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100년의 길 위에 선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임을 다짐하는 시간이었다.



네덜란드 헤이그 = 문서영 기자

▲사진설명
① 우스리스크의 최재형 선생 두 번째 거주지
② 하얼빈의 731부대 유적지 내 희생자 추모비
③ 제 2회 세계평화회의가 열린 비넨호프
④ 1963년 고국으로 돌아오기 전 이준 열사의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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