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은 영화 속에서 여자로 존재하는 것보다 탄력적이지 못하다.
선택과 간택 사이에서 스스로를 방관하는 그녀들의 삶은 고단했다.
감추고 싸매야 했던 우리네 어머니들의 치마저고리가 왜 진작 거추장스럽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너무 오래 입었다.
영화 속에서 우리는 개화된 여성성과 만난다.
토착화된 성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원래의 자리를 잡은 영화 속 그녀들은 권리를 새로 얻은 것이 아니라 그냥 되찾은 것뿐이다. 영화 ‘피아노’의 에이다는 여성이면서 한 남자의 아내인 동시에 미혼모라는 사회적 약자가 가지는 한계를 거뜬히 극복한다.
속박되지 않으며 욕망을 표현하고 사랑을 주도하는 에이다의 시선은 기존 영화 속에 포진하고 있던 억압된 여성성을 식민지의 잔재로 남긴 채 고도를 높여 활강한다.
그녀는 분신과도 같은 피아노에 정조 잃은 그녀 자신의 몸을 묶어서 바다 속에 던져 단죄하려 하지만 발목을 죄고 있던 끈을 풀어버린다. 바람과 간통에 이어지는 형벌 대신에 새로운 삶과 행복을 택한 에이다의 선택은 영화를 보는 뭇 여성들에게 짜릿한 즐거움을 준다.
이렇게 해묵은 체제와 관습을 던져버리는 행위가 영화 속에서 보여 질 때 우리는 비로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듯한 해방감을 느낀다.
영화 ‘파니 핑크’에서 스물아홉 파니는 불면과 고민의 공간이었던 관을 아파트 베란다 밖으로 던져버린다. 세상의 편견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없는 여성은 사각으로 짜여진 관 속의 죽은 존재 이상일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이 순응하고 살았던 세상의 강박관념(남자의 사랑이 여자의 전부라는 왜곡된 믿음)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택한다. 구원받아야 할 대상으로서 남자, 그리고 그들 없인 환골탈태할 수 없는 여자. 이들은 이제,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의 추풍낙엽 치마저고리와 함께 한 줌의 재로 영화 속 모처를 날아다닌다.
여성의 주체의식이란 남성이라는 성으로부터 동의 또는 인정받아 설 수 없고 거짓과 곡해로부터 세워진 주체성은 투쟁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에이다와 파니라는 두 인물은 성적 고정관념의 한계와 벽을 뛰어넘었으며 남성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여성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공통의 의미를 갖는다.
여성이 손에 쥐어야 할 것은 핸디캡이 아니라 헤게모니일 수도 있다. 에이다가 행복을, 파니가 편견을 지배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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