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새벽길은
찬물 맛이다.

그냥 그렇게 버릴 것은 모두 버리고
맨손으로 사는 겨울나무며 바위
돌멩이 하나에 이르기까지,
처음도 끝도 없는 물소리, 바람소리
나 하나 있음도 없음도 없다.

북한산 새벽길은 동양화 맛이다.

참으로 우리네가 오래도록 잊고 살던
그냥 그대로의 순수경영.
마음의 길에서 길로 열려가는 자욱한 미명의
하루가 있거니.
미움이나 슬픔으로 땅을 치며 사는 자에게,
산울림을, 있음도 없음도 없는 산울림을
누가 보내는가.


- ‘광복 30주년 문학전집’ 6권 (정음사, 1975)

해묵은 책들을 뒤적이다 보니, 오래 잊고 지냈던 스승 한분의 이름이 눈에 띈다. 송혁(宋赫;1935-1985). 가히 시인의 고장이라 해도 좋을 전북 고창 분이다. 꼭 한권의 시집을 남기고 떠났지만 이 나라 현대불교시를 이야기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이다.
어린 시절, 산문(山門)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던 운명의 주인공답게 승속(僧俗)의 울타리쯤은 자유로이 넘나들던 분이었다. 누가 인사를 하여도 따스한 눈빛으로 미소하고, 늘 나직한 음성으로 찬찬히 이야기하던 얼굴이 영락없는 스님의 그것이었다.
선생의 말씀과 몸가짐을 듣고 볼 때마다 내 어린 마음엔 문득 문학의 행로에 대한 어슴푸레한 풍경이 어른거리곤 했다. “시(詩)는 문자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저렇게 온몸으로 뿜어내지기도 하는 것이구나.”
이 시 ‘동양화’는 선생의 그러한 문학과 인생을 참으로 잘 드러내주는 작품이다. 수묵화 같은 순수세계를 경영하는 수단으로서, 한량없이 크고 넓은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구도의 방편으로서 시를 갈고 닦던 사람인 까닭이다.
새벽산길이 찬물 맛이라 언명한 첫머리도 예사롭지 않지만, 그 안(산길 혹은 물, 바람)에서 ‘나 하나 있음도 없음도 없다’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깨달음을 얻어내는 일이 어디 여간한 공력의 산물이랴.
병마가 아니었으면 더 깊고 그윽한 시의 심연을 보여주셨을 터인데, 선생의 ‘오십 생애’가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윤 제 림
시인·서울예대 교수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