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때로 칼날이 된다. 칼날이 된 바람은 우리들
편이다. 검은 구름을 매질해 보낼 때, 흙먼지가 낀
세상을 말끔하게 닦아낼 때, 헛된 것에 손을 주는
자에게 가시가 될 때, 아직도 눈알이 똑바로 박히지
않은 자에게 교훈이 될 때, 너는 때로 칼날이 된다.
바람은 항상 우리들 편이다.

- 정의홍, ‘바람’중에서


정의홍(1944-1996). 그의 시집을 꺼내 읽다가, 책갈피에서 명함 크기의 종이쪽지를 발견했다. 우편물 봉투에 적혔던 주소를 오려둔 것이었다. ‘대전광역시 서구 삼천동 가람아파트 1동 904호’. 하루를 살아도 진정으로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어 하던 시인의 옛 주소엔 여전히 그의 식솔들이 살고 있을까.
문득 시인의 큰 아들 생각이 났다. 아버지 대신 ‘동국문학상’을 받던 날, 수상소감을 말하던 모습이다. “저는 지금 제 아버지가 부럽습니다. 아니, 샘이 납니다. 이 세상에 계시지도 않는 당신에게 상을 주고 그렇게 서둘러 떠난 것을 안타까워하는 선후배 여러분들이 이렇게 많다는 데 대해서 솔직히 질투가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
나는 아들의 그 진솔한 화법에서 아버지의 개결(介潔)한 시적 진술을 떠올린다. 정의홍은 아무 것도 감추지 않는다. 숨기지 않는다. 시집 ‘하루만 허락받은 시인’의 어느 쪽을 펼쳐 읽어보아도 그의 시는 투명하다. 대부분 ‘시대와의 불화’에서 비롯된 험악한 싸움의 기록인데도 문학이 마땅히 붙잡고 있어야 할 진정성의 끈을 놓아버린 작품은 하나도 없다.
믿는 것이 있는 까닭이다. 이를테면 이런 믿음. “바람은 항상 우리들 편이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순리와 진리 그리고 섭리의 바람이다.
시인의 바람(願)을 따라 일어나기도 하고 스러지기도 하는 바람(風)이다. 그를 데려간 것도 바로 그 바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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