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번개빛에 드러난 바다의 척추
희디흰뼈 사이에 발을 딛고서
비를 맞네
하나하나의 빗방울 속에 들끓는
새들 8만 4천 八萬四千 가지새들이
일시에 날개를 펴 나를 나르네
용골(龍骨)을 돌린 뒤의
물이랑으로.
- 박제천 시전집 1권
(2005년 문학아카데미)

1975년에 나온 시인의 첫 시집 ‘장자시’의 한 편이다.
마른 번개가 치고 바다의 풍랑이 거세게 이는 풍경 이미지가 기이하다.
흰 파도 사이에 발을 딛고서 말갈기를 때리듯이, 비를 맞고 있는 시인은 의기양양하여 우주의 섭리를 꿰뚫어 나갈 듯하다. 그의 도저한 동양적 정신주의가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시인은 비를 맞으며 자연의 빗방울 속에 들끓고 있는 인간의 8만 4천 가지 번뇌를 온몸으로 읽어내며 고통스러워 한다. 탐(貪:욕심)·진(瞋:성냄)·치(癡:어리석음)·만(慢:거만)·의(疑:의심)·견(見:삿된 소견)으로 시작하여, 8만 3천 개의 번뇌들에 짓눌리어, 이제 더는 물이랑을 탈 수 없을 것 같다.
여기서 시인은 장자의 사유를 이용하여, 8만 4천 가지 번뇌(인간 삶의 실존적 유한성(有涯))를 극복할 것이 아니라, 번뇌를 긍정하고 자신뿐만 아니라, 타자 사이에 놓인 엄청난 틈(번뇌)까지 긍정하고 심연(고통)을 건너가려고 모색한다.
만물 유전의 법칙에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8만 4천 가지 고통에 스스로를 내맡김으로써 천의무봉하게 건너가고자 하는 것이다.
용골을 돌린 뒤의 물이랑에 경쾌하게 나를 맡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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