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맑은 날, 아무 의미 없어
거울 같은 날
종이에다 시 대신 노란 달을 그린다
(중략)
당신이 나를 문(Moon)이라 불러주므로
달은 나의 문패,
나는 문(文)이요, 문(moon)이 되어
그리움으로 둥실 떠오른다
가등이 되어 세상의 슬픔들을 속속들이 비추고
차라리 홍등이 되어도 좋지
사랑 찾아 거리를 서성이는
외롭고 가난한 그대들이
무상으로 그 문(門)을 열어도 좋지
-시집‘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2004년)<민음사>에서

어느 날 시인은 시를 쓰는 것이 지루해진다. 시에게 정직을 안겨주지 못하고, 과장과 미화, 아니면 허풍만 떠는 시가 지겨워진다. 밤낮 꽃이나 새나 산만 노래하는 시가 진절머리 난다. 삶의 희로애락조차 귀찮아져서 종이에다 시 대신에 노란 달을 그린다. 왜 달을 그리고 ‘문’이라고 제목을 붙였을까.
첫째 이유는 시인의 성씨가 문(Moon)이고, 둘째는 시인이 시를 쓰는 문(文)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의 제목을 ‘달’이라고 하지 않고, ‘문’이라고 한 것은, 동음이의어를 의도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시인의 특기인 말장난(언어유희, pun)을 하기 위함이다. 언어유희는 기지가 풍부하고 어조가 날카로워야 성공할 수 있다. 한마디로 외연이 풍부해야 가능해진다. 뻔한 이야기를 가지고 말장난하는 것은 위의 첫째, 둘째 ‘문’처럼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실상 시인이 달을 그리고 문이라고 제목을 붙인 근본 이유는, 셋째 ‘문’(소문자 moon)과 넷째 ‘문’(門)이다. 달(moon), 곧 시인은 가등이 되어 세상의 슬픔들을 속속들이 비춰주고, 외롭고 가난한 그대들(우리들)에게 아무 대가 없이 사랑을 나눠 주고 싶어한다. 차라리 황등이 아닌 홍등이라도 걸어놓고 거리를 헤매는 우리들에게 무상으로 사랑의 ‘문(門)’을 열어 주겠다고 말한다. 신화 속에 나오는 달의 신비한 에로스적 욕망 때문이었든, 인간의 원초적 본능 때문이었든 상관없다. 그 어떤 포스트 페미니즘으로 이만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문 시인의 지겨워진 삶이 이 정도인데, 지겹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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