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일부 학생들은 정치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을 마치 자랑거리처럼 말한다. 어쩌다 학생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어제 저녁에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에 나온 연예인 이야기, 새로 나온 게임이나 영화이야기, 컴퓨터나 카메라폰의 성능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그런 이야기 중에 어떤 학생이 대화중에 사회문제나 정치 이야기를 꺼낸다면 아마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 취급을 받을 지도 모르겠다.
오죽하면 정치인이라는 직업이 시간을 때우자고 하는 ‘우스개소리’에서조차 주로 멍청한 사람이나 사기꾼으로 등장하겠는가? 이렇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도 정치인들의 잘못이 크다. 한국의 많은 정치인들은 지금까지 지역주의나 파벌, ‘보스 정치’와 같은 기득권을 유지하는 장치에 안주해서, 정작 할 일인 국가의 발전과 국민의 복리에는 소홀해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계속 이렇게 정치를 업신여기고, 희화화하고, 천시해도 좋은 것일까? 아니다. 우리는 정치 없이는 살 수 없다. 오히려 국민이 정치로부터 멀어질수록 정치는 더 나빠진다.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정치를 챙기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만 좋은 정치를 가질 수 있다. 그 나라 정치의 수준은 그 나라 국민의 수준과 비례한다고 하지 않던가?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의 삶을 규정하는 법칙과 질서, 그리고 모순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정치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현재와 미래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 환경에 대해 자각하거나 개입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자랑스레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보다 깨끗하고 세련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인간사회를 다른 동물들의 사회와 구별해주는 것은 삶에 대한 스스로의 자각과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이다. 그것을 가지려는 의지가 없다는 일은 실은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다.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에 의하면 “자기 안에 있는 타자(他者)를 발견할 때 사람은 비로소 ‘윤리’를 얻는다”고 말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식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육체를 존중하고, 그 육체의 확장인 다른 사람의 말, 사상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팔을 꼬집으면 아픈 것처럼 다른 사람도 꼬집히면 아프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야말로 ‘사람됨’의 시작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오래 계획된 일이든, 잠시 동안의 착란이든, 피해자를 타자가 아닌 물(物)로 간주함으로써 생기는 일이다. 나치의 유대인 대량학살은 나치 학살자들이 ‘타자’의 범위를 자기 민족으로 국한시켰기 때문에 생긴 일일 것이리라.
그렇다. 자기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은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관심의 시작이고, 사회적 인간으로서 우뚝 서는 출발점이다. 그렇다면, 요즘 학생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일은 자랑거리가 아니라 사실은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김 무 곤
사회과학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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