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는 시골에 계시는 외할머니를 뵙고 왔다. 행사가 있어서 나선 길이었지만 제사보다는 젯밥에 관심이 많다고, 행사보다는 봄나들이 같은 설렘이 게으른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외할머니를 찾아간 주된 목적은 한 장의 사진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나는 4대가 나란히 찍은 사진을 갖고 싶었다. 우연이겠지만 외할머니-친정엄마-나-내 딸은 모두 장녀다. 그러니까 모두들 첫 자녀가 딸인 셈이다.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외할머니와 이제 환갑을 맞이할 엄마, 마흔의 고비를 넘겨야 하는 나, 불안한 사춘기를 직면해야 하는 내 딸은 부서지는 햇살 아래에서 카메라를 보면서 ‘김치’하고 웃었다.
집으로 돌아와 그 사진을 보면서 새삼 가족이 시간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네 여자는 서로 한 가족이지만, 그 살아가는 모습은 확연히 다르다. 결혼한 나이가 다르고, 출산한 자녀 수가 다르며, 무엇보다 자녀양육기간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단지 여성의 삶의 차이만을 낳은 것이 아니라 가족의 모습을 확연하게 바꾸어 놓았다.

전통적 쉼터의 가족

지금의 가족은 그 외형적 측면뿐만 아니라 가족 구성원이 가족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것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오늘 우리들은 가족 안에서 사랑, 단란함, 친밀감, 짙은 유대 등을 꿈꾼다. 학생들에게 가족을 정의해보라고 하면 가족에 대한 이러한 소망은 분홍색 하트, 울타리, 쉼터, 식탁같은 모습으로 기호화된다.
그러나 가족을 지금처럼 따뜻한 공간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우리 사회의 경우 불과 8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온갖 꽃이 피어나는 계절의 여왕 5월을 ‘가정’과 연계하여 상상하면서 ‘가정의 달’로 삼은 기원의 하나는 방정환 선생이 속한 천도교소년회가 1923년 5월 첫째 날을 ‘어린이 날’로 제정한 그 즈음부터가 아닐까 한다. 당시 지식인들은 전통적 가족의 단점을 거론하면서 ‘행복과 사랑이 가득 찬 평화한 가정’ 즉 ‘쉬잇홈(sweet home)’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그렇게 가족은 가장 편안한 쉼터이면서 즐거움의 원천이 되었다. 아니 돼야 했다. 사실, 가족이 개인에게 주는 힘은 실로 크다. 안정적이고 긍정적인 가족 공간은 자녀의 건강한 성장에 토대가 되며, 가족이 주는 지지적 격려는 도전에 대한 용기를 북돋을 뿐 아니라 위기를 극복하는 데 커다란 자원이 된다.

증가하는 가족문제

그런 의미에서 가족은 소중한 곳이지만, 둘러보면 물리적·언어적으로 가장 폭력적인 집단이 가족임을 증명하는 사례 또한 넘쳐난다. 가정폭력방지법이 제정되었지만 매 맞는 아내의 숨죽인 공포는 여전하며, 부모에 의해 학대되는 어린이는 죽고 나서야 그 처참함이 폭로된다. 집 밖을 뛰쳐나온 청소년들의 가출 동기는 상당부분 부모의 유기나 지나친 집착에 있다. 누가 이들에게 5월은 가정의 달임을 상기시킬 수 있겠는가.
개인에게 가족이 소중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가족 안에서 좋았던 경험이 있어야만 한다. 지금 가족의 중요함을 일깨우기 위해 5월 초에 포진돼 있는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그리고 ‘가정의 달’은 가족 구성원이 가족을 소중한 것임을 인식하도록 만들 수 있는가.
‘어린이날’은 부모나 가족이 없는 어린이에게 치명적 상처를 주는 기념일이 됐고, ‘어버이날’은 많은 주부들이 5월을 싫어하게 만드는 이유가 됐다. 현재 일상에서 벌어지는 ‘어린이 날’과 ‘어버이 날’은 처음의 본질과는 사뭇 다른 것이 됐다.
특히 얼마 전 대한가족보건복지협회가 제시한 ‘1·2·3 운동(‘결혼 뒤 1년 이내에 임신을 해서 2명의 자녀를 30대 이전에 낳아 잘 기르자’는 운동)’을 접하면서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60년대 ‘3·3·35운동(3명의 자녀를 3년 터울로 35세 전에 낳자는 운동)’이 저절로 떠오르면서, 지금의 가족문제를 야기한 보이지 않는 손이 느껴진다.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가족생활의 달성 여부는 개인과 가족만의 책임이 아니다. 그럴 수 있는 토대와 구조가 있어야 한다. 5월이 ‘가정의 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은 일상의 우리들이 아니라 가족을 둘러싼 물리적·사회적 환경을 조성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가족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은 철저히 가족적 경험에 근거하기에 ‘운동’이나 ‘선언’, 달력안의 작은 글씨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다. 광고 속의 아이들이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라고 노래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을 준 아빠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소중한 그리하여 진정한 의미의 ‘가족’이란 아이들이나 아빠, 다시 말해 혈연·결혼의 결과가 아니라 아이들과 아빠 둘 사이에서 주고받는 그 가운데에서 생성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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