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의 건물은 대웅전, 명부전처럼 모두 명칭이 다르다. 그런데 ‘관음전’이나 ‘산신각’은 명칭만으로도 모셔지는 대상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나한전(羅漢殿)’ 또는 ‘응진전(應眞殿)’처럼 만만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둘 다 명칭은 다르나 부처가 될 수 있을 만큼 덕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속세에 남아 중생들을 구제 또는 제도한다는 나한(아라한)이라는 분들을 모시는 건물이다.
나한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들이기 때문에 아주 나이가 많은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수행자들의 표상이기도 하면서 또한 신통력이 있다고 믿어왔다. ‘아라한’이라는 영화에서 배우 류승범 등이 하늘을 난다든지 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나한의 성격 가운데 하나인 ‘신통력’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일본 도쿄의 이데미츠(出光)미술관에는 고려시대 나한그림이 한 점 있다. 먹으로 그린 500폭의 나한도 가운데 남아있는 하나로 두 다리를 벌리고 양손을 허리춤에 댄 그야말로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먹으로 쓴 글 가운데 ‘을미(乙未)년, 인병속멸(隣兵速滅)’이란 문구가 특별히 눈에 띈다. 즉 “1235년에 가까이에 있는 적을 빨리 물리쳐 달라”는 목적으로 그렸다는 뜻이다. 1235년은 고려의 왕실이 몽골과의 항전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개경을 버리고 강화도로 천도한 3년 뒤이며, 강 폭 정도의 바다건너 빤히 보이는 곳에서 적들은 수시로 무력시위를 하고 전국을 초토화시키고 있을 때이다. 즉 이 그림은 팔만대장경 제작 목적과 마찬가지로 나한의 신통력이라도 빌어 국난을 극복해 보고자 하는 절박했던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전해주는 좋은 예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벌써 두 달이 지난다. 아직도 마음의 게으름을 버리지 못하였다면 나한을 뵙고 108배라도 올려보라.

정 우 택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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