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대 여성 혁명가 추근(1875-1907)

추근(1875-1907)여사는 중국 절강성 소흥의 관료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같은 고향의 호상의 아들과 결혼하였고 남편이 돈으로 벼슬을 사서 관리가 되자 남편을 따라 북경에서 살았다. 때는 바야흐로 서양열강의 침략으로 중국은 풍전등화의 위기상황이었다. 여기서 시국상황에 비분강개한 추근여사는 1904년 봄 어느날 결연히 봉건적 속박을 끊고 결혼생활을 청산하였다. 어린 자식을 친구에게 맡긴 다음 어렵게 여비를 만들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중국 최초의 여성 일본 유학생이 된 것이다.
당시 일본 동경에는 많은 중국 유학생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후에 중국혁명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손문 등 많은 혁명지사들도 있었다. 1905년에는 손문이 중심이 되어 ‘중국혁명동맹회’가 결성되었다. 이 조직이 훗날 신해혁명을 주도하는 모태가 되었다. 추근 여사는 바로 여기에 가입하여 다가오는 혁명을 위한 준비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일본 정부의 탄압을 피하여 귀국한 후에 다시 고향인 소흥으로 돌아가 살았다. 이후 죽을 때까지 여기에서 살며 중국 근대 최초의 여권운동가로서 또는 혁명운동가로서 활동하였다. 특히 지하 비밀조직인 ‘광복군’을 조직하여 무장봉기를 준비하던 중 비밀이 새 관헌에 체포됐고, 그 다음날 바로 처형당했다(1907). 꽃다운 33세였다. 형장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시는 그후 두고두고 중국 근대문학의 소재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을 울렸다고 한다.
나는 언젠가 소흥지방을 여행하던 중 추근 여사가 체포되던 그 날까지 살았던 그 집, 그 방에 가보았다. 일찍이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결혼하였던 그녀가 안락한 생활을 접고 험난한 혁명운동에 뛰어들어 가난하게 살던 집이라는 생각만으로도 어떤 감회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녀의 초라한 방 한켠에 놓여있는 침대에 살짝 때묻은 이부자리가 개켜져 있는 것이 아닌가. 여류협객을 자처하며, 군사조직을 직접 지휘까지 한 호방한 성격의 여걸이 이런 초라한 방에서 기거하며 이부자리에 때를 묻히고 있었다는 생각에 눈물이 날 듯하였다. “가을 바람 가을 비가 사람을 슬퍼 죽게하는구나”라는, 많은 사람을 울린 마지막 시귀보다도 나는 그녀의 체취가 배어있을 그 때묻은 이부자리를 보고 더 가슴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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