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전 아픔이그대로 전해오다

국가보훈처와 문화일보는 지난 7월 31일부터 5박 6일간 대학 학보사 기자 40명을 대상으로 ‘중국항일운동사적지 탐방’을 개최했다. 올해로 광복 60주년을 맞아 열린 이번 탐방은 순국선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봄으로써 젊은이들의 올바른 역사관 정립 및 애국심 향상에 도움이 되고자 마련된 것으로, 우리 신문사 기자도 참가해 뜻을 함께 했다. 편집자

“와, 중국 땅이다!” 인천서 한 시간 반 비행기 길인 상해는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드넓은 땅에서 느긋하게 자전거를 타는 여유로움이 있었다. 산이라고는 없는 넓은 평지에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서 있는 빌딩들. 상해는 발전하는 중국, 그 자체였다.
이 타국 땅에서 60여년 전 우리의 독립투사들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처절한 싸움을 했다. 지금 막 발을 디딘 낯선 나라 중국에는 이렇듯 타국에서 독립을 외칠 수밖에 없던 우리 민족의 아픔이 서려 있었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는 중국내 독립운동의 그 첫 번째 흔적이다. 복잡한 도로 가에 3층짜리 벽돌집으로 남아있는 임시정부 청사는 비록 초라하지만 지나온 시간들을 보여준다. 평범한 가정집과 다를 바 없는 이 자그마한 공간에서 조국의 독립을 논의한 투사들을 상상하니 가슴이 떨린다. 하지만 작은 문패만이 달랑 이곳을 알리고 있는 것을 보니 우리의 소중한 공간이 잘 보존되고 있지 못한 것만 같아 아쉽다.

소중한 우리유산 보존 부실해

임시정부를 떠나 밤늦게 도착한 연길. 상해보다 한참 북쪽인 이곳에는 벌써 선선한 바람이 분다. 연길에서는 상해와 달리 시가지에서 한글간판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가이드는 “이곳은 조선 연변 자치 기구이기 때문에 간판에 한글을 달아줘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돼있다”고 덧붙인다. 낯선 땅에서 만난 우리 동포들과 한글이 반갑다.
다음날, ‘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많은 비와 함께 우리를 반겼다. 50여분 가량 빗속에서 계단을 오르니 광활한 천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북한과 중국에 걸쳐있는 백두산은 높은 봉우리만도 16개나 돼 그 거대한 규모 앞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어렵게 이뤄낸 광복의 결과가 분단이라니. 언제쯤 우리 땅에서 자유롭게 백두산을 오를 수 있을까.” 천지물이 폭포가 돼 흐르는 장백폭포의 아름다움을 뒤로한 채 산을 내려오는 길에 누군가가 주절거리는 이 말이 우리 민족 전체의 아픔으로 들려온다.
탐방 3일 째 우리가 찾은 곳은 연길 아래에 위치한 용정시이다. 지금으로부터 86년 전인 1919년 3월 13일, 이곳에서 반일시위가 일어났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3.1운동에 뒤이어 중국 조선족이 일으킨 것이다. 지금도 용정시 합성리에는 그 당시 일제에 의해 숨진 사람들의 무덤이 남아있다. ‘용정 3.13 기념사업회’ 회장 최근갑씨는 “지난 89년부터 유해 조사 발굴을 시작해 미약하나마 지금의 묘소를 갖추기까지 많은 이들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고 말한다. 정부에서조차 관심 갖지 않는 일을 머나먼 이국땅에서 해내느라 고생한 사람들을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하지만 보다 체계적인 보존을 위해서는 정부의 손길이 절실해 보인다.

눈 앞에 펼쳐진 분단의 비극

북한과 중국의 국경에 자리 잡은 도문시는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로 흐르는 도문강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 오자 북한 땅이 바로 앞에 보인다. 북한으로 연결된 저 다리를 건너면 좋겠건만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 막는다. 통일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간절해진다.
이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김좌진 기념소에서 그의 손녀 김을동씨를 만날 수 있었다. 국가보훈처와 ‘사단법인 김좌진장군사업회’가 주최하는 ‘청산리 구국대장정’을 밟고 있던 그녀는 “중국에서 한국인 개인 기념관으로는 김좌진 기념소가 처음으로 세워졌습니다. 역사 교육을 제대로 못 받고 자란 조선족 동포를 위해 이곳에 더욱 많은 기념관과 문화관을 지어야합니다.”라며 조선족 역사교육 환경조성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8월 5일. 마지막 탐방지는 731부대 유적지였다. 731부대는 1932년 일본 육군참모본부의 ‘이시이히로’가 생물 무기를 만들기 위해 계획한 부대로, 한국인·중국인·러시아인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이 자행된 곳이다. “사람을 ‘마루타(나무)’로 부르며 잔혹하게 실험하고 죽였다”는 안내원의 설명이 없더라도 전시돼있는 삼십여가지의 인체실험 기구는 그 잔학성을 보여준다. 탐방단의 한 일원은 “남아있는 건물전경과 보일러실을 보니 당시의 끔찍함을 알 수 있겠다”며 안타까워한다.
선열들의 발자취를 모두 따라잡기에 5박 6일이라는 시간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주최 측의 빡빡한 일정은 ‘명목상의 탐방’에 머무르는 것 같아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광복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운 독립투사들의 숨결은 잊지 못한다. 우리는 그 뜨거운 감동을 소중히 가슴에 담고 인천행 비행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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