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청준에게 있어 소설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청준의 이전 세대인 50년대의 전후세대는 전쟁의 실상을 파악하는 감수성이나 현실 인식 능력이 50년대 이전 구세대에 비해 뛰어나 그것을 바탕으로 한 문학적인 대응 역시 탁월했다. 그러나 60년대에 들어서야 전쟁이라는 사회적 병리 현상을 객관적 거리를 두고 바라 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중심에 서 있는 작가가 바로 이청준이다.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가 방해를 입었을 때, 그 의지는 결코 은폐되거나 망각되지 않고 환상 속에서 끈질기게 재생되거나 다른 형태를 통해 변형된다.
작가는 삶의 방식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독자들에게 스스로 그 답을 찾아보게 하는 열린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작가는 개인과 현실과의 직접적 대립 관계를 설정하지 않고 자아의 진실 쪽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작가가 소설 속에 구현하고 싶은 것은 잘못된 세상과의 싸움과 자기와의 싸움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삶이나 세상에 대한 진정한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우선 정직하게 자기와의 싸움, 즉 반성을 통해 의미 있는 창조성을 도모해보겠다는 것이다.
거기서 출발하되, 작가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하는 지평은 개인의 진실과 집단의 꿈이 화해롭게 조화를 이루는 세계이다. 이런 작가는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의 면모를 보인다.
즉, 그가 찾아나서는 ‘새로운 이념의 문’ 은 ‘이미 존재하는 현실의 벽’ 을 옳게, 충분히 성찰하지 않고는 발견되지 않는다. 뚜렷한 현실인식에 바탕을 두고 예리한 성찰을 통해 이상을 꿈꾸는 이청준의 사유방식은 상당히 변증법적이다.
주로 6·25에 얽힌 공포에 대한 원형적 체험을 바탕으로 가지고 있는 ‘이청준의 초기 텍스트들이 오늘날의 독자에게 어떤 문화적 텍스트로 어필할 수 있는가’ 의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풀린다. 현재에도 ‘전짓불’ 은 그 외형만 변화해 왔을 뿐 계속 존재한다. 또한 자기 진술의 욕구는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욕구이다. 그러므로 이 텍스트들은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의 개인에게도 의미 있는 주제를 담고 있다. 또한 작가·화자·독자가 동반의 관점으로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나가고, 자아 탐색을 통해 어떤 확정적 진실을 얻고자 하기보다 그 탐색의 과정 자체를 중시하는 열린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독자 개개인에게 유의미한 방향으로의 독서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유의미한 텍스트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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