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장기 휴교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주도한 만세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3·1운동의 전면에 나선 이는 명진학교 출신이자 불교중앙학림의 강사였던 한용운이었다. 그는 백용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33인의 민족지도자로 참여하였다.

한용운은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2월 28일 저녁, 종로 계동의 자택으로 불교중앙학림 학생들을 긴급히 소집하였다. 이날 한용운의 자택에 모인 청년은 신상완·백성욱·김상헌·정병헌·김대용·오택언·김봉신·김법린 등이었다. 이들은 독립선언서 3만 매 중 불교계에 배당된 1만 매를 받아 절반은 서울 일대에, 나머지는 지방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이와 같이 3·1운동의 전면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불교중앙학림의 설립에 관여했거나 강사 출신, 혹은 재학 중이던 청년승려들이었다.

3·1운동을 통해 우리 민족의 저항과 분노를 확인한 일제는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식민교육제도를 재정비하였다. 한국인에게도 고등교육을 실시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식민교육을 담당할 교원과 총독부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기독교와 천도교 등 종교계는 고등교육기관을 운영하고 있었으나 불교계만큼은 고등교육기관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불교계는 청년승려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불교중앙학림을 불교전문학교로 지정하였으나 예산 부족으로 인해 전문학교 설립을 백지화하고 말았다.

재단의 결정에 반발한 학생들은 전문학교 승격 등 5개항의 요구조건을 학교에 건의하고, 1921년 9월 21일 6개조에 달하는 ‘중앙불교전문학교 승격에 대한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하지만 재단 측의 대응에 실망한 학생들은 10월 1일을 기하여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동맹휴학이 진행되는 와중에서도 30본산 주지들과 소장파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주지회의 정기총회가 예정되어 있던 1922년 5월 26일에는 양측이 따로 회의를 개최함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극도의 불신감을 드러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월 29일에는 주지회의 측 인사들만 참석한 가운데 1923년 3월말까지 동광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여 재단에서 경영하기로 하는 대신, 당장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불교중앙학림은 향후 5년 동안 휴교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로 인해 불교중앙학림은 또다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용범
소설가·동국 100년사 대표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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