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정상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코끼리상 만큼 내게는 묘한 충동을 불러오는 것이 없다.
그 등에 타올랐다가 불상 앞에서 천배를 했다느니, 퇴학을 당했다느니 하는 괴괴한 소문이 코끼리 주위에 보이지 않는 철조망을 쳐놓고 있다. 코끼리를 우습게 대해선 안 된다는 학칙이 정말로 있다면 분명 그 코끼리가 불교정신의 구현을 표방하는 학교의 상징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떠한 사소한 사물이든 사람들이 의미를 그 사물에 고정하고 어떤 큰 사고의 상징으로 여길 때 그것들은 무시할 수 없이 신성한 것이 되어버린다.
코끼리 뒤에 교칙이 있듯, 신성한 상징의 배경에는 규율이 있다. 규율은 손쉽게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을 역설하는 상징물을 끌어오고 상징체계를 감히 범했을 때는 사회(학교)를 무시하는 부적절한 인물로 취급한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이 제대로 된 규율이라면 규율은 거듭 새롭게 태어나는 속에 있어야 한다. 그 전의 규율은 새로운 사람들의 정당한 요구에 얼마든지 자리를 내주어야 하겠다. 코끼리가 다 커서까지 새끼 코끼리 때의 철창을 고집하는 사육사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다원의 사고가 곳곳에서 펼쳐지는 이 시대에 규율은 금기로 갑옷을 만들어 버티고 서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견이 수렴되는 움직이는 형태를 띠어야 한다.
동국 100년을 맞아 코끼리는 거듭날 필요가 있다. 필요에 따라서 용기 있는 사람들의 의견이 표출되는 장으로서 색깔 있는 옷도 입지 말란 법이 없다. 이제 물어볼 때도 되었다. 지금, 코끼리의 등에 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최두호(예술대 문창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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